
요즘 부모는 일단 시작부터 을이 된 기분이다. 공부하는 자식 앞에서는 괜히 더 약해진다. 화내지 않고 조곤조곤 아이에게 뭐든 타이를 줄 아는 것이 부모의 기본 소양인 데다가 공부하는 애가 기분 상할라 분노가 날 삼키기 전에 이 상황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 아이랑 딜을 할 땐 무슨 거래처에 굽신거리는 영업직이 된 거 같다. 그걸 또 아이가 아는 거 같을 땐 더럽게 약 오른다. 스스로 공부하겠다고 공부 잘해보겠다고 선언한 아들은 내 속으로 나온 새끼란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기특했다. 그래서 공부 방해하지 않게 괜히 기분 상하지 않게 살살 내가 눈치를 보게 되더라? 근데 얘는 불행하게도 말만 번지르르하다. 얘가 불행한 게 아니라 내가 불행하다. 진짜 객관적으로 타고난 공부 머리도 평범한데 의지가 독한..

비정규 학습지가 종종 날아온다. 나는 계약 안 했는데… 무료 체험하라는 뜻인가. 사진첩에 볼따구가 도드라진 사진들이 남아있다.어릴 때 사진도 볼따구가 귀여운 사진은 비교적 오래 갖고 있는 거 같다. 생일 포함 새해, 크리스마스, 결혼기념일까지 다 무덤덤한 내가 화이트 데이라고 감흥이 있을 리가 없는데 케군이랑 하루가 꼭 챙겨야 한다며 회전 스시집에 판을 벌렸다. 그냥 얘들이 스시가 먹고 싶은 것뿐이다. 와방 촌스러운 스페셜 케이크가 있어서 먹었다. 너무 촌스러워서 사진 찍은 건데 엄마가 화이트 데이를 기뻐하며 기록하는 줄 알고 엄마 사랑해~ 축하해~하며 부비부비 얼굴을 비벼온다. 이 얼굴까진 덤덤할 수 없지. 크 기여워리모컨 자동차를 자전거에 싣고 공원에 나갔다. 또래 친구들을 그때그때 만들며 일회성 만..

손주들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는 시아버지 집에 하루가 부린 어리광…방 한가득 이(딴) 것을 만들어놨다. 할아버지랑 하루는 비밀기지라고 우기는데노숙텐트임. 하루가 아버님 집에 쌓여있는 박스들로 집을 만들기 시작하자 아버님이 바닥에 돗자리도 깔고 막 전기 선도 연결하고 (아버님 더 신나신 거 확실하다) 안 쓰는 티브이도 전화도 연결하고 라디오, 거울, 손전등빗자루 쓰레받기둘이 꽁냥꽁냥 만든 장난감에쓰레기통까지꽃으로 장식한 창문으로 뭘 자꾸 주문하래. 하루는 할아버지가 있어서 너무 행복하겠다. 도시 한복판의 복합주택에서 뛰지도 못하는 손주들이 항상 안쓰럽다는 아버님. 하루가 놀러오면 톱질 칼질 망치질 같은 걸 하면서 놀아주셨다. 하루가 만들기나 뚝딱이는 놀이를 좋아하게 된 건 이공계 출신에 설계가 직업이셨던 할..

하: 엄마 오늘 학교에서 윷놀이했어. 학교에서 돌아온 하루가 느닷없이 말했다. 뭐라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본 초등학교에서 다 같이 한국의 전통 놀이를 했다고?? 나: 진짜야? 그… 그걸 어떻게 알고 했어??? 하: 원래…. 다른 시간인데 선생님이 하자고 그래서 다 같이 나가서 했어. 운동장에서. 나: 세상에.. 그걸 어떻게 했지?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대? 케이 컬처 위상을 느껴야 하는 대목인가. 아니면 다양한 나라의 전통놀이 경험해 보는 건가? 윷을 어디서 났지? 와!! 진짜 신기하네!!! 별 상상이 다 되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신기한 것이다. 나는 어벙벙하기도 했지만 너무 기뻐서 서랍 안의 잊혀져 있던 윷놀이를 꺼내왔다. 나: 이거 봐. 우리 집에도 있어!!! 엄마가 하루 다섯 살 땐가..

카톡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여긴 설날이라고 3번이나 듣고야 외웠다. 듣고 또 잊어버리고 다른 친구한테 듣고 또 잊어버리고 ;ㅂ;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게살 좋아하는 하루. 지난 새해에 이례적으로 꽃게가 저렴했다. 집에서도 먹고 시댁에 가서 다 같이도 먹고 원없이 먹었다. 새롭게 먹일 수 있는 게 생기면 어찌나 안심되는지. 나는 우리 부부 사이에서 이렇게 편식 심한 아이가 태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케군은 자기 취향 아닌 음식이라도 눈앞에 있으면 다 먹어치우는 녀석이고 나는 내장, 비계, 닭껍질, 멍게, 해삼 혐오식품일수록 더 좋아하는 음식에 있어서는 비위 갑인 사람인데 말이다. (몇 개 못 먹는 것도 있긴 있어요ㅋㅋ) 애착인형 목 조르며 양치하는 하루 근데 애착인형은 평생에 한 개 정도인 줄..

11월엔 나도 좀 감기에 걸렸었는데 초등학교는 무슨 저주받은 것처럼 코로나, 독감, 전염성 어쩌고저쩌고 돌림노래처럼 돌고 돌아 매일매일 3분의 1이 결석을 했다. 전문가들은 마스크 벗고 처음 맞는 겨울이라 밀린 숙제처럼 애들이 면역력을 키우는 중일 거라고. 한국도 그랬다면서요? 하루에게는 11월 어느 주말에 돌림노래 차례가 왔다. 배가 아파 뭔가 기분이 안 좋아.. 이 말을 할 때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와-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나도 신기했다. 육아 짠밥? 하루야! 빨리 화장실로 가! 화장실!!! 충분히 가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아이는 싫어했다. 그리고 거실에 다 토해냈다. 그나마 내 예견으로 러그 한 장에 가둬서 큰 피해를 막았다. 하루는 엄마 미안해.. 하며 토를 했다. 으이구. 너 이건 진짜 미..

하와이에서 묵었던 호텔 바로 앞 쇼핑몰은 물이 흐르는 정원처럼 꾸며져있었다. 그때 우리는 왜 거기를 지나갔었더라? 아 나랑 케군이 하와이 구석구석 거닐면서 구경하고 싶었었다. 무슨 가게가 있나 사람들은 어떤가 이 동네는 어떤 분위기지. 그런데 하루는 그게 재밌을리 없었다. 물놀이하러 언제갈건지만 중요했는데 마침 나는 기분이 좋고 정원 물 속에 플라스틱 스푼이 하나 보였다. -하루야, 저 스푼 보이지? 쟤는 지금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 -거짓말. -진짜야. 우리가 눈치 못채고 있을 뿐이지 쟤 움직여. -어떻게 알아? -쟤는 사실 3층 푸드코트 카레 집에 있던 스푼이었어. 우리도 밥 포장할 때 거기 스푼 받았지? 그 통에 들어있었어. 어떤 사람이 카레를 포장해서 스푼을 받고 날이 너무 좋아서 여기 1층에 와..

돈키호테를 둘러보다가 쇼와시대 초기 엄청 레트로한 크레파스가 재탕된 것을 발견!!! 아.. 예쁜데… 이제 하루는 크레파스 안 쓰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아쉬워하며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순수하고 천진한 아이의 시절은 어느 한 계절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구나. 생각보다 삽시간에. 여기는 다이소가 야심 차게 내놓은 디자인에 힘 좀 쓴 잡화점 . 불꽃놀이 세트 패키지가 너무 이뻐서 충동 구매했다. 연필 세트도 샀다. B1부터 B6까지 연필심의 농도를 대변해 케이스 색이 점점 짙어진다. 모아보면 너무 기발하고 간질간질한 디자인… 조하! B5는 흔히 볼 수 있는 흑심이 아니라 사 봤다. 애가 아직 연필 쓰는 나이야. 크! 좋았어. 나의 문구 소비욕을 애로 때우는 슬픈 사실. 필기구 쓰고 싶으니까 영어 필사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