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여전히 점심시간에 스파게티 집 아르바이트를 한다. 벌써 6년째가 되어버렸다. 처음 시작할 때 일을 가르쳐주던 주부 아르바이트 선배가 8년째 일하고 있다는 얘길 듣고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1년이 그냥 한 달처럼 지난다. 일주일은 몇 번 밥 해 먹고 치우고 개키고 했더니 벌써 지나있다. 나보다 스무 살은 어린 점장님이 나한테 뭘 잘못한 게 있어서 서로 껄끄럽게 일을 한 다음 날. 출근해 보니 은행 업무 파일에 이런 한국말 메모를 남겨놓았다. 와- 진짜 노력이 가상해서 봐준다. 꼭 아들 같기도 한 마음이 들어 그냥 맘이 풀어졌다.점장은 극도로 내향형이다. 서비스업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주방에서 보내니까 업무 내용은 잘 맞는 것 같은데 종업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부분에서 여러 가지 문..

지난겨울은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약체로 보냈다. 열이 세 번이나 나고 (10년간 통틀어 세 번 날까 말까인데… ) 3월 초에 코로나 때의 악몽을 떠올리게 할 만큼 목이 따끔따끔해졌다. 병원에 가려고 한 날은 아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하루한테 소리를 질렀나… ‘ㅁ‘ 이비인후과에 갔다. 독감도 코로나도 안 나왔다. 기관지염인 거 같다는 진단을 받고 선생님이 엄중한 말투로 절대 며칠간 말하지 말라고 속삭임이라도 말을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안 그러면 목소리를 잃을 수도 있다고 진짜 이렇게 말하셔서 엄청나게 겁이 났다. 그때 제일 겁이 났던 것은 이제 두 번 다시 노래방에서 노래를 못 부르게 되면 어떡하지였다. 말을 못 하게 된다는 건 오히려 담담했다. 말 때문에 후회했..

우연히 하버드 대학에서 실시하는 한 연구에 대해 들었다. 사춘기 관련 동영상을 줄기차게 보다가 조선미 교수의 강의에서 봤으니 우연도 아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수백 명을 추적해서 자손의 자손까지 행복한지 조사하는 초대형 연구였다. 고학력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몇십 년 후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열쇠는 무엇인지 심하게 흥미로웠다. 지금도 연구는 진행 중이지만 현시점에서 유력한 결론으로 알려진 것은 불쾌함, 곤란함, 우울감을 겪거나 크게는 삶의 역경을 겪을 때 얼마나 잘 극복하고 빨리 잊느냐였다. 한마디로 회복탄력성이 행복감에 직결된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들어온 말이라 놀랄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같은 영상에서 행복의 기간적 정의를 다시 듣게 된 것이 매우 새로웠다. 행복은 좋은 느낌..

절친의 존재는 위대하다. 초등학생의 인생을 좌우한다.하루가 지금 행복한 초등학생인 이유는 유마라는 절친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루는 유마를 만날 수 있어서 매일매일 학교에 가는 게 즐겁고 토요일마다 유마랑 놀기 위해 숙제하고 밥 먹고 잘 자고 잘 씻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사소한 모든 것을 공유하는데 나까지 유마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유마의 입맛, 취향, 성격, 특기를 파악해 버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착하고 좋은 아이가 절친이 되어서 참 다행이었다. 얼마나 좋은 아이냐면 한 번은 둘의 담임선생님이 유마랑 하루가 같이 노는 모습을 보고 "하루는 좋겠다. 선생님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유마처럼 착한 친구랑 친했으면 참 좋았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루랑 친구가 된 이후로 유마는 엄..

“인터넷 계좌의 이체 금액이 조금밖에 안 되더라고요. 큰 금액을 보낼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떤 상태인지 봐 드릴게요. “여직원은 내 현금카드로 여러 가지 조회하면서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그리고 다른 서비스를 가입해야 금액을 늘릴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나는 그냥 단순히 궁금했다. 은행 시스템에 대해 잘 몰랐다.”그렇구나.. 이거랑 그건 뭐가 다르죠? “지금 상태에서도 이체가 가능한데 왜 금액을 늘리려면 다른 서비스가 필요한지 물어 본 것이다. 그런데 여직원은 내가 일본어를 이해 못 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이. 체. 서. 비. 스. 가. 입. 이. 필. 요. 해. 요. “보청기 낀 할아버지도 깜짝 놀라게 소리쳤다. 나는 웃음이 터져서 뒷 말을 곧이어 할 수가..

스미마셍… 스미마셍…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렸다. 휴지가 없나? 만화나 영화에서 자주 봤던 장면인데 그러고 보니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인 거 같기도 하고… 내심 재밌다 생각하면서 얼마큼 휴지를 뜯어줘야 할지 걱정이 겹쳤다. 사람들은 한 번에 얼마나 쓰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 이 분은 어떤 경우에 처해 계실까. 짧은 시간 동안 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완전히 다른 경우셨다.“구급차 좀 불러 주세요…”깜짝 놀랐다.“괜찮으세요!!? 자… 잠시만요…! “나는 의도치 않게 목소리가 엄청 커졌다. 내 목소리에 내 귓청이 떨어질 거 같았다. (아 놔 아줌마처럼 왜 이러지) 망설임 없이 119에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음만 울리고 아무도 받지를 않았다. 상상했던 것보다 길게 울리는 신호음에 갑자기 나는 119가 아..

이틀 칭칭 감은 지혈 밴드는 정말 방망이만 하게 컸다. 누가 봐도 존재감이 뿜뿜이었다. 다친 다음 날 당장 대신해 줄 사람이 없어서 두 시간만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주문받고 음식 나르고 커피를 내려놓고 그 방망이가 많은 손님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한국에서라면 처음 간 식당이라도 누가 칭칭 감고 일하고 있으면 “어머~ 아프시겠다~” “에구 다치셨나 봐요.” 지나가는 말을 할 거 같은데….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스무 명에 한 명이라도? 그날 일하는 동안 아무도 내 손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서른 명 넘는 손님이 단체로 이게 안 보이는 걸까? 그렇지.. 뭐 도쿄 사람들 특기지. 머리론 알고 있었다. 근데 어느 시점에서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

어디 다치면 된장 바르는 세대는 아니었지만 (이모들이 진지하게 그렇게 조언하던 기억은 있음) 빨간약을 집에 두던 시절에 자란 나는 여전히 다친 손가락엔 소독약 바르고 반창고 붙이고 물에 닿지 않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씨게 박혀있다. 과산화수소를 뿌리면 상처부위에 부글부글 거품이 나는 걸 멍하니 쳐다보는 게 참 재미있었지. 이제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까?그리고 언제부턴가 하이드로콜로이드 반창고를 쓰게 됐지만 (일명 ‘메디폼’) 나는 지금껏 그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한참 부족했단 걸 알게 됐다. 솔직히 어릴 때 쓰던 소독약+건식 반창고만 있어도 아쉽지 않았고 하이드로콜로이드 반창고가 미덥지 않았고 새로운 정보를 내 안에 업데이트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런데 손가락을 7미리 베이고 이렇게 큰 상처를 하이드로콜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