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요즘 부모는 일단 시작부터 을이 된 기분이다. 공부하는 자식 앞에서는 괜히 더 약해진다. 화내지 않고 조곤조곤 아이에게 뭐든 타이를 줄 아는 것이 부모의 기본 소양인 데다가 공부하는 애가 기분 상할라 분노가 날 삼키기 전에 이 상황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 아이랑 딜을 할 땐 무슨 거래처에 굽신거리는 영업직이 된 거 같다. 그걸 또 아이가 아는 거 같을 땐 더럽게 약 오른다.

스스로 공부하겠다고 공부 잘해보겠다고 선언한 아들은 내 속으로 나온 새끼란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기특했다. 그래서 공부 방해하지 않게 괜히 기분 상하지 않게 살살 내가 눈치를 보게 되더라?  근데 얘는 불행하게도 말만 번지르르하다. 얘가 불행한 게 아니라 내가 불행하다. 진짜 객관적으로 타고난 공부 머리도 평범한데 의지가 독한 것도 아니고 시간 개념도 아직 미숙하고 주의력도 너무 없다. 왜 이러는 거야… 뭘 믿고 한다는 거야…

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매일 같이 전쟁이었다. 지가 들쳐 매고 온 학습량은 산더미 같으면서 (꼭 보내달라고 한 학원에서 데꾸 옴) 세월아 네월아 진도가 안 나가는 거시다. 안 나오는 샤프랑 30분 씨름하고 있으면 좀 해라 좀 해라 굽실대다 속이 터져 거! 집어치우고 연필로 풀어!! 꽥 소리를 질러야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고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보면 전혀 상관없는 백과사전을 줄곧 읽고 있다. 부글거리는 엄마를 피해 낑낑 자기 방으로 책상을 옮기더니 한동안 조용했다. 한참 뒤 내 등어리가 쎄-한 것이다. 밥 하다 말고 아이 방에 들어갔다. 그 순간 무슨 90년대 시트콤처럼 우당탕탕 만지고 있던 아이폰을 놀래서 허공에 튀긴다.

이미 눈이 돌아간 애미가 아이폰을 잡아채서 보니까 씨잘데기 없는 유치한 게임을 하고 앉았는데… 하..
자기는 잠깐 했다고 아냐.. 계속 아냐… 엄마의 야마가 심하게 돌기 전에 수습해 보려고 하는 아들. 너 애미가 아이폰을 20년 가까이 쓴 거 모르지. 세상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설정에 들어가 오늘 무슨 어플을 몇 분이나 썼는지 아이폰이 기록하고 있는 화면을 들이댔다. 이 자식이… 40분이나 뻘짓을 하고 앉았었다.

내 심경 이 상황 앞으로 일어날 우려 등등을 마구 퍼붓고도 너무 화가 나서 말도 걸지 말라고 길고 긴 냉전을 시작했다. 침대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던 하루가 아빠 방에서 공부를 다 끝내고 엄마 방에 왔다.

자기가 얼마나 미안했는지 얼마나 후회했는지 말하면서 말을 걸었다.
엄마..ㅠㅠ 미안해.. 하루 중학교 입시 안 해도 되니까 우리 화해하자.. ㅠㅠㅠ
지금 하루에게 얼마나 그 입시가 얼마나 간절한지 잘 아는 내게 그 마음이 전해졌다. 으이구… 이 자식 진짜 반성한 모양이었다.

아직 유혹에 약한 아이가 혼자 방에 핸드폰이랑 둘이 남았다면 (이런 적이 거의 처음이다) 뻔한 결과인데 하루는 아직 아기인데. 나도 속상했다. 이런 상황들이 다.

예전에  하루가 이런 말을 했었다. 엄마가 화가 나서 심하게 말할 때 하루는 머릿속으로 엄마를 때리고 다시 안 보고 싶을 정도로 밉다고. 되게 솔직하지 않은가.  그날 밤 아까도 엄마 때리고 싶게 미웠냐고 물었더니
- 아니. 미안했어… 너무 미안했어…
라며 다시 눈물을 쏟았다.
얘 참 객관적이네…

그리고 그다음 날 우린 예정에 있던 키자니아에 놀러 갔다. 한참 전에 예약해 놓고 하루가 엄청 고대하던 날이었다. 나는 살짝 이런 가능성도 생각했다.
호오… 나랑 계속 냉전 상태면 키자니아고 뭐고 다 날아가는 거였겠지? 엄마랑 화해해야 할 이유가 하루에게는 너무 많았던 것이다. 무려. 키자니아.

나는 정말이지 안내문 읽고 준비물 챙기고 스케줄 정하고 학습량 계획 세우는 게 너무 즐거운 엄마다. 이런 나를 기쁘게 이용하지는 못할망정 내 재능을 한 껏 낭비하고 있는 게 너무 안타깝다.

예를 들면 어떤 날은 같이 집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슬슬 분노 게이지 오르게 하는 말투를 하루가 남발했다. 짜증과 투정을 넘어 무례와 버르장머리를 넘나들었다.
그래도 공부하는 자식 앞에 을인 나는 최대한 참았다. 살살 달래서 오늘 학습량을 끝내고 싶은 계획 본능.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문제 채점할 때 일이 터졌다.

죄다 툴툴대다 이번엔 틀린 문제에 사선 긋는 게 너무 싫다고 지랄이다. 내가 얼마나 고운 말투로 설설 기었는데 틀린 문제를 틀렸다 하지 여기에 뭐 현대 아트를 그려놓을까. 아 뒌장 못해먹겠네. 때려치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혼자 하라 그럼 옆에 와서 안 도와주면 못하겠다 하질 않나. 욕받이를 하면서 계속 돕는데 꼬투리도 이런 꼬투리를 잡질 않나. 니가 무슨 방금 출산한 여자도 아니고 옆에 남편 숨소리도 짜증 난다는 이 시추에이션 뭐냐고.

그 다음날 가족 셋이 온천탕 (찜질방 스타일)에 놀러 갔는데 나랑 하루가 여전히 냉전 중이라 하루는 아빠랑 돌아다니고

나는 여성 전용 라운지에서 얼굴에 팩 얹고 라테 마시고 소설 읽다 티비 보다 꾸벅꾸벅 졸고 왔다.
천국이 따로 없구만.
이 보라고- 나랑 그 다음날 마주칠 일 없다 생각하니까 사과 따위 없잖아. 애들이 이렇게 계산하며 산다니까요.

그래서 짧은 봄 방학 동안 나는 새로운 작전에 돌입했다.
매일매일 즐거움 가득한 이벤트를 시전 했다.

어느 날은 낮에 가라오케에서 공부하기.
요즘 가라오케는 밖에서 음식 가져와도 되는 곳이 많다. 도시락 사서 공부하다 노래도 부르며 한참 놀았다.

사춘기 눈빛

어떤 날은 공부 일찍 끝내면 밤 산책 가기.

엄마 좋아
엄마 사랑해
절로 나옴

또 다른 날은 아사쿠사 방탈출 카페 가기
아이 수준에 맞는 게임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미리 예약했다.

미스테리 시어터 아사쿠사

50분이 정신없이 지나갈 정도로 너무 스릴 있었다. 문제 하나씩 풀 때마다 두뇌 풀가동도 하고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끈끈함도 생기고.
문제 내용을 절대 스포 하면 안 돼서 방 안의 사진은 금지였다.

아사쿠사 유명한 소바집도 가고

내가 좋아하는 아사쿠사 전통 찻집도 갔다.

하루는 고구마랑 아이스

나는 안미츠와 커피

내일 엄마랑 즐거운 하루를 위해 그 전날 엄마 눈치를 좀 보며 예의를 탑재하는 선순환.

내가 좀 계산적이라 그런가 애들도 사람인데 가족이니까 무조건 서로 사랑하란 말은 억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들이 내게 주는 기쁨이 존재 자체만은 아닌 것처럼 아이들도 부모에게 바라는 걸 얻을 수 있어야 호감이 지속되지 않을까. 분명 떡밥 육아 필요하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