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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여자

만 8살 2023년 늦여름

Dong히 2023. 11. 11. 16:05

돈키호테를 둘러보다가 쇼와시대 초기 엄청 레트로한 크레파스가 재탕된 것을 발견!!! 아.. 예쁜데… 이제 하루는 크레파스 안 쓰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아쉬워하며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순수하고 천진한 아이의 시절은 어느 한 계절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구나. 생각보다 삽시간에.

여기는 다이소가 야심 차게 내놓은 디자인에 힘 좀 쓴 잡화점 <Standard Products>. 불꽃놀이 세트 패키지가 너무 이뻐서 충동 구매했다.

연필 세트도 샀다. B1부터 B6까지 연필심의 농도를 대변해 케이스 색이 점점 짙어진다. 모아보면 너무 기발하고 간질간질한 디자인… 조하! B5는 흔히 볼 수 있는 흑심이 아니라 사 봤다. 애가 아직 연필 쓰는 나이야. 크! 좋았어. 나의 문구 소비욕을 애로 때우는 슬픈 사실. 필기구 쓰고 싶으니까 영어 필사라도 해야겠어… 주객전도의 끝판왕이네. 이런 생각을 하며 연필은 사고 필사는 시작도 안 했다.

로봇 교실에서 여름방학 때 만들어 온 건데 안 쓰는 화장품 브러시를 달라더니 빗자루를 만들어서 쥐어놀더라.

너!! 누가 이런 기발한 생각 하랬어.

엄마는 이 놀이 너무 맘에 들어.

학원에서 만들어 온 유리구슬 현미경으로 소금 보는 중. 이제 만 8살은 절대 그냥 놀 수가 없다. 모든 인풋이 산수 국어 사회 과학과 연관 짓게 하려는 어른들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짐ㅋ 아 왜 안쓰럽지 ㅋㅋㅋ

소노다에게 팔을 주었다.
흰 고양이 인형, 소노다는 스스로 팔베개를 한 채 꿰매어져 있는 길쭉한 쿠션이었는데 어느 날 가여운 생각이 들었던 나와 하루.

그래서 뒤통수 매듭을 풀어주었다.
그랬더니 천배 귀여움 ㅋㅋㅋㅋㅋㅋ
하루는 매일 밤 소노다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나는!!! 자유다!!!!! “ 하며 소리친다ㅋㅋㅋㅋ

하루랑 스시집에 갔던 날. 나는 치라시스시를 주문했다. 달콤 새콤한 초밥용 밥을 깔고 여러 종류 사시미를 보기 좋게 얹은 덮밥을 말하는데 일단 예쁘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와사비와 간장을 어떻게 먹는 게 정답일까. 케군은 간장 종지에 와사비랑 간장을 섞어 덮밥 위에 뿌려 먹는다. 지금껏 나도 그렇게 따라 하다가 그날따라 검색을 해 봤다.

정답은 스시 한 점에 와사비를 올려 간장을 찍은 다음 밥에 다시 덮고

밥이랑 같이 들어 올려 먹는다-였다.
이유는 먹는 모양새가 예쁨.
매너 가르쳐주는 사이트의 마지막에서 만약 간장을 섞어서 밥 위에 뿌리고 싶으면 (말투가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만류하는 느낌ㅋ) 주변 사람들한테 뿌려 먹어도 되냐고 한 마디 양해를 구하래. 뭐래 ㅋㅋㅋ그런 낯 뜨거운 대화를 왜 시켜. 아무튼 열심히 이쁘게 만든 치라시 스시에 간장을 덮어서 채도 확 죽여버리는 건 아까운 데다가 하나하나 간장 묻혀 밥에 돌아오는 예쁜 과정이 귀찮아서 한 방에 훅 뿌리겠다는 당신의 생각은 너무 게걸스럽네요?라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참, 내.  
그래도 본 대로 한 번 해 봤다. 스시 한 점에 와사비를 조금 묻혀 간장을 새초롬하게 묻혀 밥에 올리고 먹을 만큼 떠서 앙 먹었는데!!!!! 와 나 순간적으로 지금 선 보러 온 줄 알았잖아. 급 한낱 나 자식이 너무나 우아한 것이다. 번거로운데 작은 몸짓 디테일 하나로 교양을 뿜어내더라고. 게다가 생각해 보니 간장에 젖어서 밥알이 후두둑 떨어지는 일도 없이 깔끔하게 먹을 수 있었다. 사는데 지장 없는 짓을 내가 얼마나 많이 하는가. 머리는 왜 하고 옷은 왜 사고 화장은 왜 해. 암, 매너도 그런 것이었지. 배만 채우려면 짐승과 다를 게 뭐냐. 예쁘게 먹으면 기분이가 조크든요였어… 치라시 스시 하나로 느닷없이 being human을 만끽했다는 어이없는 일화. (하루 성장 기록을 못 쓰겠음.. 자꾸 내 얘기로 돌아왘ㅋㅋ)

아직도 저런게 있네!

라면 아저씨가 밤 장사를 시작하러 가시는 길.

처음으로 한 이비인후과의 네블라이저 치료.
엄마, 이 연기 좀 맛있어.

한국에서 자기 용돈으로 사 온 비행기 조립을 드디어 완성했다. 조각이 너무 작고 쉽게 부서져서 힘 조절이 정말 어려웠지만 다 이겨냈다. 완성했을 때의 그 뿌듯함을 이제 좀 아는 듯하다. 애랑 나는 정말 다른 개체인데 아이가 이런 성과를 얻으면 나도 모르게 너무 뿌듯하고 마음이 꽉 차서 소름이 돋는다. 아이에게 집착하고 소유하고 조종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되는 것. 사실 속마음은 다르지 않은데 애는 애고 나는 나지~ 겉으로는 나는 안 그런 척 쿨한 척하는 것뿐이다. 제발 나의 그런 코스프레가 아이에게 들키지 말고 잘 성공하는 것이 목표일 뿐.

며칠 전에 하루가 친구들이랑 공원에서 놀고 있을 때 이야기를 들었다. 타이요가 유마의 물통을 내동댕이쳐서 유마가 엄청 화가 났다. 유마는 독특하게도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악을 쓰며 화를 냈는데 마침 핸드폰을 집에 두고 온 날이라 하루의 전화기를 빌려 진짜 신고를 한 것이다. 곧 동네 파출소에서 경찰이 왔고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의 이름과 부모의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갔다고 한다. 혹시 엄마한테 전화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가 한껏 걱정하며 나한테 털어놨는데 참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었다. 그리고 한참 고민에 빠졌다. 어느 대목에 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인가.
애들이 싸우다 경찰을 부른 것? 친구에게 전화기를 빌려 준 것? 좀 더 다른 아이디어가 없었던 것?
소소한 것들을 수정해 주기엔 나도 정답을 모르는 데다가 별로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예가 아닌 거 같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자기 전 침대에 누워 하루에게 이런 결론을 냈다.

솔직히 엄마는 하루가 잘못했는지 아닌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루가 생각했을 때 정말 위험하고 불안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전화기를 타인에게 빌려주는 건 불필요했지만 경찰에게 전화를 하는 게 완전히 언제나 잘못된 행동은 아닌 거 같다고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면 경찰에게 전화할 수는 있는 거라고. 부모들이 지금 당장 달려올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을에 있는 어른이 경찰이라면 전화로 해결 방법을 물어볼 수 있는 거라고.

미용실에서 처음으로 샴푸의자에 누운 날.
내가 꼬실 땐 꿈쩍도 안 하더니 미용사 형아가 해 볼래? 하니까 배시시 누워본단다.

어땠냐니까 잠들 뻔했다고
ㅋㅋㅋㅋㅋ

엄마!! 지금 이거 사진 찍어줘!!

아들육아 전문 강사 최민준 TV를 열심히 시청하면 이런 아들들의 멍뭉소리에 살짝 심경의 변화가 온다.
예전엔 그냥 귀찮고 왜 저러나 싶었으나 요즘은 완벽한 수평을 맞춘 새로운 몸 기술이 대단하다며 다른 것도 할 수 있어? 위에 뭘 올려볼까? 비슷한 수준의 멍뭉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면 그때 환하게 퍼지는 아들의 찐 미소에서 ’엄마 진짜… 사랑해…‘라는 문장을 읽을 수 있다.

최민준 강연 중에 제일 인상적이었던 내용이 뭐냐면,
엄마! 오늘 내 등에 3명이 탔어!! 아들이 이랬다치자
한국 엄마들은 열이면 열 이렇게 말한다.
누구야!/ 왜!! /이름 대!/  안 다쳤어? /걔가 너 괴롭혀? ㅋㅋㅋㅋㅋ 그렇게 아들과 엄마는 점점 멀어져가는 거라고
정답은 이거다.
우리 아들 힘 장난 아니다!!

자매품 딸이랑 멀어지는 아빠의 대화는 이거다.
-아빠 00이가 맨날 인사하는데 오늘은 말도 안하고 그냥 갔어.
-에이 너가 잘못봤겠지.
엄마들은 알잖아. 여자들의 초민감한 친구사이의 공기감을ㅋㅋㅋ  이건 솔직히 엄마라고 정답을 말해줄 순 없는데 그게 얼마나 고민되는 일인지만은 알아줄 수있다는 게 다르다고.

어느 날 주인을 잃은 차일드 시트가 쓸쓸해 보여 장바구니를 벨트 채워 집에 오는데 세네 살 정도의 하루가 타고 있는 착각이 들어 등어리가 뜨듯해져 왔다. 그리고

지난주에 자전거 가게에 가서 완전히 차일드 시트를 철거하고 휑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날 참.. 맴 한구석이 시리고 썰렁했다.

첫 스시에 도전!!!

바로 뱉음

리모컨 자동차를 가지고 공원에 갔던 날 할로윈 이벤트로 북새통이었다. 그냥 코스프레에 진심인 일본인이 활개 쳐도 되는 오피셜데이 아닌가. 아시아 국가 중에 할로윈 너무 소중한 거 일본이 독보적이 아닐까. 재밌는 건 40대 50대, 정말 나이 많아 보이는 분들도 생각보다 많이 즐기고 있었다.

구석에 내몰려진 아이들끼리 요리조리 자리 잡고 잘 놀다 왔다. 리모컨 차를 운전하고 있으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아이들이 있다.
- 나도 한 번 해봐도 돼?
-응
언제나 아무 거부반응 없이 리모컨을 척척 빌려주는 게 나는 신기하다. 과거 그렇게 빌려주다 차가 박살이 나는 경험을 해 놓고 말이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그래도 혼자 노는 것보다 같이 한 번씩 하면서 노는 게 재밌잖아.
라고 했다. 혼자 할 거면 집 주차장에서 혼자 하면 되지 공원에 갈 필요는 없다면서. 나는 공놀이도 잘 못하니까 새 친구들 만나려고 이런 걸 가지고 공원에 가는 거라고. 그런 말을 들으니 이건 또 굉장히 나 같더라. 사람한테 안 좋은 기억을 입어도 결국 사람이랑 있을 때 가장 즐거우니 만나고 또 사귀는 나 같다.

테이블 펴 놓고 하루랑 당고를 하나씩 먹으며 책 읽고 사진 찍는 휴일의 공원. 몇 살까지 이런 거 같이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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