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숨 안 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듯이 읽은 책 만났다. 몇년 전에 수상했대서 화제였던 책이라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다. 읽을 사람들은 이제 다 읽었는지 도서관에 꽂혀있는 걸 발견. 도서관 책 예약하면 순서대로 연락해주는데 예약하지 않는 이유는 이제 읽으라고 메일 받는 순간 괜히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리스트 짜서 읽을 책을 미리 정한 건 꼭 누가 공부시키는 것 같아 거북해진다. 아.. 이래서 내가 공부를 못했구나..(깨달음) 마치 자유로운 영혼인척 그날의 기분이랑 타이밍이 맞아 어쩌다 손에 들린 책을 읽는 일이 많다. 그리고 빌린 책이 아니라 구입한 책이라도 본전 생각하지 않고 내 스타일이 아닌 거 같으면 도중에 하차한다. 책은 꾸역꾸역 읽어야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세상에 책이 얼마..

나는 마흔 살 가까운 어느 날 문득 이런 결심을 했다. 누군가 지난 일들에 대해 후회 섞인 말을 한다면 다 잘했다고 말하기로. 그리고 실제로 점점 그렇다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했던 일들에 대해 -아니 왜 그랬어 -아 아깝다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했다 그거 말고 반대 선택을 하지 그랬어란 뉘앙스의 조언을 들을 때마다 속만 상할 뿐 내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난 후에 그들이 틀린 일도 종종 있었다. 어떤 선택도 돌아갔을 뿐 틀린 답은 없었고 인생에 무엇도 쓸데없는 경험이 아니었다. 사고와 방황도 나중에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더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해 봤자 공상 과학을 즐길 게 아니면 시간 낭비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생기는 경험들은 다양하기 그지 없다. 영어가 또 한 번 나한테 세상은 이렇게 재밌다는 걸 발견하게 만든다. 그날은 영어 회화 학원에서 한국에서 살아봤던 영국 남자 튜터를 만났다. 아직 20대인데 이미 두 나라 취업 유경험자라니 부럽고 신기하도다. 그룹 레슨이었지만 나 말고 아무도 예약자가 없었다. 운 좋게 일대일 수업이 되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화색이 돌며 한국에서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 에피소드 만으로도 긍정이 터지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어 나는 즐겁기 짝이 없었다. 사기 당한 경험도 인생의 거름으로 즉각 응용 가능한 유형이랄까. 보통 몇십년 쯤 흘러야 웃으며 회상할만한 걸 단 몇달 만에 과거형으로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나는 좋아하고 동경..

5년 만에 아키(국적: 타이완)를 만났다. 아키가 결혼과 육아에 도통 적성에 안 맞는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만나서 들은 에피소드들은 하나하나 절정을 이뤄 정말 심각한 지경을 지나 거의 시트콤 수준이었다. 대학 다닐 때 아키는 일본인 남자친구와 동거 중이었다. 연애 기간이 길었는데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현남편이자 구남친인 그분이 한 달 중 20여 일 해외 출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주일 해외에 있다 3일 일본에 머물고 다시 나가는 식이었다. 아키는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뿐이다 싶을 정도로 그 생활에 만족했었다. 결혼 후, 가나가와현에 새 집을 지은 아키. 탓짱과 툿짱 (가명) 아들 둘을 낳고 빈번히 집을 비우는 남편과 비교적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물론 누군가와 살을 부대끼며 ..

역 앞 1분 거리 스파게티를 파는 레스토랑의 런치 타임은 카오스다. 안내하고 주문받고 서빙하고 치우고 세팅하고 계산하러 뛰었다가 곁눈질로 물 컵이 빈 테이블이 없나 체크하고 식후 음료수나 디저트를 시킨 손님이 밥을 다 먹었는지 신경 쓰면서 틈틈이 키친에 설거지 거리를 업소용 식기세척기에 나열해 넣어야 한다. 뇌와 몸이 풀가동이다. 할머니가 돼서도 이렇게 생활하면 치매는 안 걸릴 거 같은 기분. 계산하는 곳에 희한하게 계단 한 칸이 있다. 입점할 땐 오르는 계단이라 괜찮은데 나갈 땐 한 칸 내려가는 계단이라 발을 헛디뎌 훋! 할 수가 있다. 그동안 약 3년 근무하면서 야매 통계가 생겼다. 2,30대 손님은 90퍼센트 확률로 안 넘어진다. 설령 헛디뎌도 가볍게 다시 균형을 잡는다. 40대 이상으로 추정되는 ..

여러분들 덕분에 우울함이 증발했어요. 체력은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조금만 활동량이 많으면 저녁땐 허리가 끊어질 거 같고 헉헉대지만 정신적으론 뭐였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좋아졌다. 이제 스멀스멀 피식- 웃었던 일들이 많이 떠오른다.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이 날 좋았지. 따스했지. 행복했던 기분이 선명하게 떠올라 살 맛이 난다. 하룻밤에 놀랍도록 많은 양의 술을 마실 수 있는 케군은 술과 함께 과식을 하고 꼭 걷자 한다. 그리곤 꼭 10여분 걷고 화장실을 찾아 쩔쩔맨다. 그날도 화장실 빌리려고 들어 온 신사에서 고요한 불빛을 사진에 담으며 기다렸다. 비싼 돈 주고 부은 걸 줄기차게 화장실에 내버리는 케군은 밑 빠진 독에 술을 붓는 느낌 아닐까? 술 못 마시는 나로선 신기하다 신기해. 사쿠라가 예뻐서 발길이 멈..

나란 인간의 최대 장점이자 특징은 매우 스케일이 작다는 것이다. 야망이 없어서 좌절이 흔치 않고 욕심이 거하지 않아 쉽게 만족하는 편이다. 일상에서 명확하게 매 순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가끔 돌아볼 땐 자기 현실을 꽤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지금 문제없이 사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벅찬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도 많으니까 별일 없다는 게 너무 고맙다. 그런 내가 얼마 전에 심하게 우울했다. 오랜만에 길게 한국에 나갔는데 며칠 후 코로나에 걸려 갇혀있다시피 했다. 첫날 언니들한테 미안하고 그냥 서러운 마음에 엄청 울었다. 몸도 아프고 졸음만 쏟아지고 시간은 가고 여기는 내 집이 아니고 한국에서 하려던 것들은 취소되고 먹고 싶은 음식조차 없어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벼르고 벼르던 것들을 아무것도 먹고..

-하루야, 한자 테스트는 그럼 언제쯤 할 건지 얘기만 해줘. 그걸 정하는 건 하루 마음이고. 진심으로 같이 의논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렇게 말한 건데 갑자기 버럭! 하고 아이의 감정이 날아든다. -아!! 알았어! 지금!! 지금 하면 되지!! 지금 하면 될 거 아냐!! 헐… 얼탱이 없어. 예전의 그 울음이 들어있는 징징이 아니다. 짜증을 넘어 화가 담긴 사내의 외침 같은 느낌이다. 한 발짝 물러서서 가만히 내가 했던 말을 돌아본다. 그래 네 입장에선 저 말들이 마치 ‘어 널 못 믿어. 난 널 안 믿는 전제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하는 것처럼 들렸겠구나. 진짜 나는 대충의 시간만 알면 거기에 맞춰 마음의 준비나 스케줄을 짜려고 했던 것뿐인데. 내가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 동안을 노려본다고 오해하고 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