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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야, 한자 테스트는 그럼 언제쯤 할 건지 얘기만 해줘. 그걸 정하는 건 하루 마음이고.
진심으로 같이 의논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렇게 말한 건데 갑자기 버럭! 하고 아이의 감정이 날아든다.
-아!! 알았어! 지금!! 지금 하면 되지!! 지금 하면 될 거 아냐!!

헐…
얼탱이 없어.

예전의 그 울음이 들어있는 징징이 아니다. 짜증을 넘어 화가 담긴 사내의 외침 같은 느낌이다. 한 발짝 물러서서 가만히 내가 했던 말을 돌아본다. 그래 네 입장에선 저 말들이 마치 ‘어 널 못 믿어. 난 널 안 믿는 전제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하는 것처럼 들렸겠구나. 진짜 나는 대충의 시간만 알면 거기에 맞춰 마음의 준비나 스케줄을 짜려고 했던 것뿐인데.
내가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 동안을 노려본다고 오해하고 있나. 또
-알았다고 알았다고!!!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지우개를 잡은 손이 벌겋도록 힘을 주고 맘에도 없는 한자 숙제 앞에 앉는다. 이미 꼬라지는 날대로 나서 아무 소통이 안 된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짓 참 못해 먹겠다. 엄마의 말투가 아이를 바꾸네. 엄마의 말 습관도 연습이 필요하네 모르는 거 아니고 겁나 동의하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든 한 마디 한 마디 존중과 사랑을 담아 인생이 계속 면접 중인 사람처럼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거냐. 아무리 백 마디 노력해도 한마디 한 치라도 논리에 구멍이 나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아이 공격을 맨 몸으로 받아내야 하고 아주 상전 모시듯 살 얼음판을 걷듯 해야 하는 거냐고. 이런 불평을 드러내면 세상 사람들은 몰랐냐. 애를 낳았으면 원래 그런 거 아니냐. 엄마니까 당연하다. 이렇게 몰아붙인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걷잡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두 달 전으로 돌아갑니다. 학원 갔다 온 하루가
-엄마 엄마! 한자 검정 시험이란 게 있대. 초등학교 2학년이 배우는 한자가 나온대 하고 싶어!
자격증 욕심에 나를 조른다. 현행 학습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한자만 딱 출제된다는 게 마음에 들어서 한자 검정시험 9급을 신청했다. 그리고 시험 3주 전이 되었다. 같이 서점에 가서 과거 문제집을 직접 고르게 했다. 시험 유형이 어떤지 몇 분 정도 시간이 주어지는지 체감하게 하고 싶었다. 과거 문제집이 5회짜리랑 13회짜리 두 종류가 있었다. 당연히 5회짜리를 고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13회짜리를 하겠다고 집어 든다. 이럴 거면 엄마가 고르지 왜 아이한테 고르게 했냐고? 자기도 포도를 먹고 싶었는데 엄마가 포도를 골라주면 괜히 그 포도는 안 먹겠다는 게 아이이다. 일부러 귤을 골라야 포도를 스스로 고르는 비효율적인 작업을 매일 같이 해야 한다. 귤이나 포도였으면 그냥 냅뒀을텐데 문제집... 감당도 못할 문제집.. 나는 남은 날짜를 손가락을 펴서 가르쳐주며 이걸 다 풀려면 일주일에 몇 번을 해야 하는지 계산해 보자 설득했다. 끝없는 언쟁에 내 입에 침이 말라갈 때쯤 이런 말 소모도 진짜 짜증이 나고 귀찮아 뒤지겠어서 (진심..) 그래.. 그럼. 정말 꼭 푸는 거다. 이게 더 비싼 거 알지? (이를 갈며) 약속을 받아냈다.

이런 역사를 지닌 문제집이잖아. 그걸 오늘 몇 시쯤 할 수 있는지만 물어본 건데 그게 너의 심기를 그렇게 건드린 질문이었니. 이런 상황에 어이가 우수수수 없어지는 건 진정 엄마로서 틀린 자세야? 내 마음가짐이 틀려먹었어? 나도 이제 때려치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벌써 9회까지 풀었으니 솔직히 초2가 할 수 있는 능력은 넘어섰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근데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도 필요한 거 아니야? 아니 밤에 해도 된다고. 누가 뭐래? 혼자 오해한 건 너고 나 지금 하아.. 부글부글.. 내가 이런저런 갈등과 고민과 울화를 삭히면서 침묵을 지키는 동안 어찌어찌 하루는 씩씩대면서도 한자를 풀어냈다. 지우개한테 화를 얼마나 냈는지 불쌍한 지우개는 뭔가 측은한 모양이 되었다.

꽤 시간이 지나고 "엄마 말투가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엄마는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오늘 중에 하루가 이걸 할 거란 건 믿고 있었어. " 사과를 했다. 솔직히 이런 말 할 기분 아니었지만 업무다 생각하고 클레임 거는 고객한테 매뉴얼 시전한다 생각하고 메소드 연기로 사과했다. 화해가 끝나고 신나게 서예학원에 갔다가 영어학원에 다녀와서 (아무것도 없는 날을 만들어야 학교 친구들과 공원에서 놀 수 있기 때문에 학원 두 탕 뛰는 날이 생김. 서예 다닐 거면 영어를 그만두자니까 두 번째로 좋아하는 학원이니까 절대 안 된단다. 발음 게임 컴플리트 해야 그만둘 거라나? 잘 모르겠지만 암튼 교묘히 꿀 발라놓은 영어학원도 놓지 못하겠단다.)

그리고 저녁시간이 되었다. 어제 예약해 놓은 온라인 화상 영어 시간이 돌아왔다. 하루는 요새 한국인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운다. 원래하고 있던 온라인 레슨에 영어/한국어/일어/중국어 4개 국어 아무거나 선택할 수 있고 일부 선생님은 2개 국어를 담당한다는 걸 발견했다. 한동안 일본인 선생님한테 영어를 배웠는데 어느새 영어는 뒷전이고 계속 일본말로 수다를 떨고 있는 게 아잉가. 그러는 와중에 한국인 선생님도 선택할 수 있단 걸 알게 됐다.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수다를 떤다면 한국어 연습은 되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네? 그래서 한국인 선생님과 하기 시작했는데 귀엽게도 한국어로는 좀 부끄러운지 나보고 옆에 계속 있어달란다. 그렇게 25분 유난스러운 엄마처럼 셋이 수업을 하게 되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선생님. 저 딴짓하는지 감시하거나 선생님들이 잘하고 있는지 긴장시키려고 거기 있는 거 아닙니다. ㅠㅠ 처음 몇 번은 꽤 괜찮았다. 영국에 사는 한국 사람, 싱가포르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한국 사람, 일본에 유학 중인 3개 국어 되는 한국 형아, 한 번은 나한테 배운 문장으로 Where are you living? 묻고 러시아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하루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하루야 궁금하면 물어봐. 하루 지금 전쟁 중인 나라에 살고 있어서 괜찮은지 궁금한 거지?" 대신 말하니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선생님은 "응, 난 괜찮아. 음... 어.. 음. 괜찮아." 라며 뭔가 하실 말씀은 있지만 어린아이에겐 못하겠다는 듯 뒷 말을 아끼셨다. 세상 속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자극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몸을 베베 꼬기 시작하더니 눈이 흐리멍텅하고 소파에 몸을 푹 파묻고는 마이크에서 멀리 떨어져 대충대충 Yes! Yes! No! No! 뉘 집 자식인지 진짜 싸가지 없게 구는 것이다. 너도 힘들 만도 하지. 알겠다. 알았어. 근데 지금 선생님이 눈앞에 있잖아. 온라인 영어는 가상의 인물이 아냐. 인격체가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다고. 똑바로 앉아서 제발 저분을 존중하라고. "하루야.. 선생님한테 조금 상냥하게 말해줄 수 있어?" 여러 번 속삭이며 인내의 시간을 가졌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없어.
-선생님 따라 해봐.
-어ㅣㅑㅏㅓ3#$4%%$^^^ (말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
급기야 선생님이 "밤늦게까지 수업하느라 힘들죠... 조금만 참고 힘내보자.."라는 소리를 하셨다. 진짜… 어쩌면 좋아.. 미안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급기야 보란 듯이 크게 한 숨을 쉬며 하아.... 하더니 테이블에 엎드려버린다. 낑낑 일으키니 이걸 장난이라 생각하는지 갑자기 "엄마 방구끼지마" 갑분 히덕거리기 시작했다. "하루야....." 내 낮은 목소리에 선생님도 하루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까지 어쩔 줄 모르게 했다는 자책감과 이렇게 만든 아이가 너무 얄미워서 가슴이 진짜 답답해져 왔다. 그리고 "오늘 너무 수고했고 힘들었을 텐데 이제 잘 자."라는 인사로 온라인 수업이 끝나자 나는 너무 억울했다.

졸지에 이 늦은 밤까지 애를 공부하라고 몰아넣고 끝없이 푸시하는 반 미친 엄마같이 비쳤다는 게! 내가 하는 온라인 영어를 따라 하고 싶다고 한 것도 아이고. 한국어 선생님으로 하고 싶다고 한 것도. 교재가 아니라 프리토킹으로만 하고 싶다고 한 것도. 이게 다 아이가 시작한 건데. 왜 벌여놓고 자기는 이렇게 비협조적인 건데! 영어가 끝나자마자 빽! 소리를 질렀다. 오늘 하루 참고 또 참았던 게 터진 거 맞다. "누가 이렇게 버릇없게 하라고 그랬어!!!!! 이럴 거면 예약 왜 했어!!! 하품을 쩍쩍하고 방구가 어쩌고저쩌고? 넌 그게 웃겨???? 선생님이 힘들지? 하고 미안하해 하시는 거 못 봤어? 왜 너가 하고 싶다고 해 놓고 선생님을 미안하게 만들어!! 왜 곤란하게 만들어!!! 선생님이 무슨 죄야!!! 엄마는 무슨 죄야!!! 너가 지금 한 행동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인지 몰라???!!!!" 저 세상 데시벨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못됐게도 방금 끝난 수업의 녹음을 다시 재생시켜 똑똑히 들려줬다.

철렁! 하는 얼굴이 보였다. 아까 낮의 박력 넘치는 사내는 온데간데없고 엄마… 미안해… 영락없는 아기처럼 울기 시작한다. 이제 느낌으로 아이가 정말 미안해서 하는 미안해인지 눈치껏 하는 미안해인지 반어법적 미안해인지 구분이 된다. 얘도 지금 너무 미안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뜻의 미안해였다. 그런 아이한테 더는 못 하겠고 씩씩거리며 다른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다. 그렇게 그날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아이가 버려진 느낌만 받고 끝나버렸다. 난 열심히 했지만 성과는 하나도 없고 오히려 마이너스 실적만 남긴 채 퇴근한 기분. 근데 월급도 보너스도 없음. 그냥 나는 이 일이 적성에 안 맞나 보다 미래가 막막해지기만 하던 밤.

엄마한테 일본어 수업하고 계심

그리고 며칠 후에 GOT7 진영의 솔로앨범 발매 인터뷰를 타이핑하는데 이런 내용이 들렸다.
질문: 데뷔 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점이 있다면 뭘까요?
진영: 저는 조금 가벼워진 거 같아요. 예전에는 잘해야지. 그런 부담이 컸다면 지금은 부담이 있지만 그 무거운 마음이 도움이 안 된다라는 건 이제 알았어요. 그게 어떻게 보면 오래 할 수 있는 데에 가장 큰 마음인데 그거를 이제는 조금 느껴서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타자를 치던 손이 절로 멈췄다.

학교 갔다 온 하루랑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했다. 한자 시험 과거 문제집 지금까지 잘해줘서 고맙고 나머지는 무리하게 하지 말자고. 마지막 주관식 문제 몇 개씩만 풀어보기로 했다. 애가 우겨서 산 게 뭐 대수냐.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해 준 게 어디냐.
그리고 진짜로 이제 베네쎄 호비 문제집은 그만두고 콜라쇼 (호비에서 초등생이 되면 콜라쇼 캐릭터로 바뀜)랑 바이바이~ 안녕할까? 했더니 순식간에 눈에 물이 그렁그렁 차 올라 “그거능 슬퍼… 시러….” 엉엉 울었다. 아 젠장알 워드 초이스 실패했어 ㅋㅋㅋㅋ 구래구래. 알았엌ㅋㅋ 미안해. 아직 헤어지지 말자 ㅋㅋ(웃참 실패) 그럼 국어는 하지 말고 산수만 풀고 조금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만하는 걸로 조정을 했다.
또 영어학원에 연락해서 아이가 흥미를 가지고 학원에서 단어 배우는 건 좋아하지만 영어 스펠을 따라 쓰는 건 아직 효과적이지 않은 거 같다고 상담했다. 듣기랑 읽기에 집중하고 쓰기연습은 보류해도 될까요. 1,2년 후엔 다시 숙제 내 달라고 부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라고 덧붙였다. 아이 환경과 상황이 확확 바뀐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어렵지 않게 그러자고 메일을 주셨다. (일본 엄마들한테 이런 말 하면 그런 엄마 처음 봤다며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난 주판 선생님 숙제도 반 커트한 이력이 있음. 이 에피소드로 나한테 반해서 친해진 마마토모가 있다. )
그리고 진지하게 온라인 영어 회화 이제 그만할까? 때가 되면 또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고 했는데 계속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매일 25분 플랜에서 월 8회 플랜으로 바꾸자고 협의 봤다.

휴..

이 모든 것들은 뭉뚱그려 이렇게 불린다.
그냥 육아했다.

오늘도 많은 일이 있지만
그냥 육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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