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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하는 여자

우울

Dong히 2023. 4. 20. 15:11

나란 인간의 최대 장점이자 특징은 매우 스케일이 작다는 것이다. 야망이 없어서 좌절이 흔치 않고 욕심이 거하지 않아 쉽게 만족하는 편이다. 일상에서 명확하게 매 순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가끔 돌아볼 땐 자기 현실을 꽤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지금 문제없이 사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벅찬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도 많으니까 별일 없다는 게 너무 고맙다. 그런 내가 얼마 전에 심하게 우울했다.

오랜만에 길게 한국에 나갔는데 며칠 후 코로나에 걸려 갇혀있다시피 했다. 첫날 언니들한테 미안하고 그냥 서러운 마음에 엄청 울었다.
몸도 아프고 졸음만 쏟아지고 시간은 가고 여기는 내 집이 아니고 한국에서 하려던 것들은 취소되고 먹고 싶은 음식조차 없어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벼르고 벼르던 것들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문득 열흘 치 옷을 꽁꽁 이고 지고 온 가방이 보였다. 한 번도 안 입고 다시 가져가는 옷들 천지였다. 한심하고 부질없었다. 20대에 워킹홀리데이로 일본에 건너왔을 때가 생각났다. 내 인생을 모아 놓은 것 같은 내 짐은 그냥 가방 하나였다. 1년 3개월 간 워홀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갔을 때도 달랑 가방 하나였다. 그때 느꼈던 내 존재의 간소함을 잊을 수가 없다. 충격이었다. 솔직히 그 조차도 있으나마나 했다.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간대도 뭐 아쉬울 건 없을 거 같았다.

며칠 전 한국에서 돌아오고도 한동안 깊은 바닷속에 덧 없이 잠겨서 더 이상 살 수 없을 거 같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발버둥을 쳐 봤자 소용없을 거 같아 꿈틀대려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도 머리 한쪽에선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다른 자아가 속삭였다. 밥을 하면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겨우겨우 샤워를 하면서 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지? 중얼거렸고 뭘 먹어야 하는데도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배를 채워야 하는 사실이 귀찮았다. 일부러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화면을 보는 내내 이렇게 맛있어 봤자… 소화되고… 없어지는데 맛있는 게 뭐 그래서 그걸 먹어서 어쩌자고?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게 가장 괴로웠다. 뭘 해도 궁극적인 의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열흘동안 손을 뗐던 영어 공부를 다시 하려는데 말도 안 들리고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조금 더 잘했던 거 같은데.. 이렇게 안 들릴 수가… 열흘 쉰 것뿐인데 모든 게 다 원점으로 돌아간 듯 쌓아왔던 모든 게 없어진 기분이었다. 영어 공부는 2년 넘게 뭘 한 거지? 돈은 벌어 뭐 하지? 아이는 잘 키워 뭐 하지? 이 아이는 열심히 공부해 대학 가고 그리고 직장 가고… 그다음은 뭐지? 매일매일 어딘가에 다니고 나가던 시절들이 끝나고 마흔이 된 내게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뭘 위해 앞으로의 40년을 살아야 하는 걸까. 소비하려고 버는 허무한 생을 또 40년 이어나가면 되는 걸까. 그건 재밌는 걸까? 지금까지 그게 재밌었나? 어떤 기분이었더라. 아- 무참해. 공허해.. 그런데도 세금을 내야 하고 학비를 벌어야 하니 매일매일 스트레스 속에 출근하는 케군을 보고 너무 불쌍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미안해…. 너무 미안해… 이걸 다 끝내고 싶은 마음이 덜컥 들기도 했다. 이상한 꿈을 꾸며 심장이 심하게 두근대 매일 밤 잠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엔 머리가 멍-했다. 티 안 내려고 아이와 종일 밝게 지내고 잠깐 짬이 나면 너무너무 피곤해서 눕고만 싶었다. 나는 좀 더 건강하고 활기 있는 사람이었던 거 같은데..  체력적으로 내가 끝난 거 같아 그것도 무섭고 슬펐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부터 점점 수면 가까이 떠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무엇이 부풀었는지 모르겠지만 신기하게 부력이 생겼다. 중력이 이기고 있을 때는 한 없이 우울하더니 부력이 커지면서 점점 예전 같은 평범함을 되찾아갔다.
물 먹은 솜인형 마냥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긴자에서 밥을 먹고 나온 길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한 날이었다. 우르릉 쾅쾅 번개가 치더니 저녁 시간엔 맑아졌다. 길이 샤워한 듯 깨끗하게 씻겨져 반짝반짝했다.  그동안 컬러감 없던 세상의 색이 보였다.

한국에 다녀온 뒤로 우리 없이 쓸쓸했을 케군이 애틋해졌다. 우린 사귀기 시작했을 때 “서로를 외롭게 하지 말자, 서로를 귀여워해주자 “ 약속했는데 집에 아예 없다가 돌아와서도 내내 힘들어하고 오래 케군을 외롭게 한 거 같아 그제야 속이 상했다..

하루도 의미 없어?
하루도 필요 없어?
역시 나는 엄마니까 엄마라는 이유 하나로 이 녀석에겐 무조건 오래 살아 있어야 좋은 존재라는 것. 그냥 있어주면 되는 것. 여기에는 어떤 반박도 못하는 내가 있었다.

아니.. 그랬었는데 나는 엄마고 되게 되게 네게 중요한 사람인데 그래야 하는데 이제 네 옆에 딱 붙어 훔치고 달래고 얼르는 일이 없어지니 하루의 의미보다 내 의미가 없어진 거 같아 우울했었나. 자꾸 우울했던 계기와 이유를 찾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몰라서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힘들었다. 대화가 이어질 자신이 없었다. 나 우울해… 왜냐면.. 그걸 몰라…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우울했다가 아니다가 긴자에 갔던 날은 전부는 아니지만 내 존재의 타당함과 중요함을 깨닫는 순간순간이 생겨났다.

사실 마음은 어두운데 애써 웃었던 순간

이날을 계기로 수많은 ‘도쿄에 살고 있는 마흔두 살 한 아이의 엄마’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 뇌에 조금씩 들어와 안심하며 조금 평범해질 수 있는 힘을 받았다가.. 아니다가…

인생에서 이렇게 계기도 없이 우울한 경험을 한 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사귄 남자한테 차여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을 때나 계속 회사면접에 떨어져 내 존재가 먼지 같았을 때도 힘들었는데 힘들었던 이유가 확실해서 그 우울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었다. 기간 한정의 우울함이라는 것을 마음속 어딘가에서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였는데 그때에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장 무섭고 두려웠던 사실은 아무 계기도 없이 그냥 훅 왔다는 것이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것이 뒤로 살살 와 뒤통수를 친 거 같아서. 친구가 그랬다. 웬만한 어려움을 이기고 이제 안정적으로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다고. 그런 사람에게 왜 이런 끈적한 기분이 들게 된 건지 그게 무서웠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거 같아서 너무 괴로웠었다. 제발 내일 일어나면 사소하게 지나가는 시간들이 따뜻하게, 잡다한 일을 하며 뿌듯하게, 예쁜 카페를 발견하면 기쁘게, 반찬거리를 진지하게 걱정하게 해 주세요라고 매일 밤 바라며 잠이 들었었다.   

지금은 괜찮다. 많이 나아졌다.

1. 도서관에 자주 왔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았다.


2. 에세이와 소설 코너에서 책을 넘기고 넘기며 마음에 드는 필체를 발견해보려 했다.  지독히도 불행한 삶을 살았던 전쟁 중의 일본여자 책을 읽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평범한 삶에서 의미 없고 목적 없는 삶을 선택한 사람의 에세이를 읽었다. 어느 회사 어느 부서 누구누구이던 자신이 형체가 정해지지 않는 물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침대의 얼룩은 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필사적이지 않으면서 평범하고 싶다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주제가 마음에 들었다.

3. 큰 보폭으로 자주 걸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삶의 의미가 아니라 근육일지도 몰랐다. 이 세상은 전부 과학이고 생각은 허상이며 인간, 물건 하물며 공기조차 전부 화학물질이라는 생각을 계속 상기시켰다.

4. 어떻게든 영어 공부를 이어갔다. 한국에 가기 전부터 오픈했던 한국어 수업은 이미 예약이 꽉 찼기 때문에 무거운 몸과 마음을 이끌고 수업을 했다. 그 시간이 내내 힘들었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내 학생들을 보며 왜 배우는 걸까. 배워서 뭘 하려는 걸까. 결국 남는 게 뭘까. 실례되는 생각을 줄곧 했다. 아주 마인드가 글러먹었다. 이래서는 안 될 거 같아 다음 레슨은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영어공부를 계속 이어갔다. 내가 다시 배움의 기쁨을 얻어야 배우려는 학생들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직도 나는 만족스럽게  예전 영어실력을 찾진 못했다. 아니 내가 예전에 어디까지 영어가 가능했는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내가 어이가 없기도 하다. 원래 이랬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거뿐인 거 같다. 빨리 정확하게 본인의 실력을 알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나도 내가 어처구니가 없다.

5. 단순 노동에 온몸을 맡겼다. 내가 삶의 의미가 어쩌고저쩌고 자꾸 잡생각에 지배받는 이유는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인 거 같았다. 복잡한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짜 낸 해결책이 생각이 필요 없는 단순한 작업을 부지런히 해 보자였다. 때마침 인터뷰 타이핑 일이 미친 듯이 들어왔다. 들리는 대로 기계적으로 타자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파스타 집 아르바이트도 나와달라면 군말 없이 나갔다. 때마침 가게 앞 대학교에 새 건물을 증설해서 미친 듯이 학생 손님이 들어왔다. 몸으로 하는 노동은 정말 신성하다.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손 발이 나갔고 일본어는 외국어가 아니라 마치 프로그래밍 언어처럼 엔터 치면 주문받고 서빙하기 위한 대사가 줄줄 나왔다. 내가 세상 구석의 한 부품처럼 어딘가에 끼워져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렇게 하루의 몇 시간을 자동 재생되고 나니 나머지 시간의 자유가 조금 달콤해서 좋아하는 미드를 찾아보거나 끝나고 뭘 해 먹을까 기대하게 되었다.

아직 나는 완전한 수면 위로 올라오진 못했다.
신 맛을 잃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여태 우울의 이유를 찾는다)
나는 신 맛을 정말 좋아하는데 식초 음료를 마셔도 발사믹초 드레싱을 뿌려도 신 김치를 먹어도 맛있지가 않다. 신 맛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기승전결 하나도 없고 결론도 없는 글이지만 그래도 진솔하게 쓴 포스팅인데 이런 글 아래에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유익한 포스팅이었어요” 라며 기계적인 댓글이 달리겠지? 본문은 읽지도 않았을거야. 열심히 하루하루를 사는 분들이니 악 감정은 없지만 예전에 서로의 일상을 글로 나누고 따뜻한 댓글을 남기던 블로그 문화가 그립다. 나 그걸로 진짜 친구, 진짜 진짜 좋은 사람들 많이 사귀었는데. 나도 광고는 올리지만 가끔 영혼 없는 상업성 댓글을 보면 되게 쓸쓸하다. 참, 이번에 한국 가서 처음으로 입금 된 광고비를 쏠쏠하게 써서 구독자 분들에게 너무 고마웠다. 고마워요..

그리고 전 매일매일 많이 좋아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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