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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하는 여자

계단 하나

Dong히 2023. 7. 17. 17:07

역 앞 1분 거리 스파게티를 파는 레스토랑의 런치 타임은 카오스다. 안내하고 주문받고 서빙하고 치우고 세팅하고 계산하러 뛰었다가 곁눈질로 물 컵이 빈 테이블이 없나 체크하고 식후 음료수나 디저트를 시킨 손님이 밥을 다 먹었는지 신경 쓰면서 틈틈이 키친에 설거지 거리를 업소용 식기세척기에 나열해 넣어야 한다. 뇌와 몸이 풀가동이다. 할머니가 돼서도 이렇게 생활하면 치매는 안 걸릴 거 같은 기분.

계산하는 곳에 희한하게 계단 한 칸이 있다. 입점할 땐 오르는 계단이라 괜찮은데 나갈 땐 한 칸 내려가는 계단이라 발을 헛디뎌 훋! 할 수가 있다. 그동안 약 3년 근무하면서 야매 통계가 생겼다. 2,30대 손님은 90퍼센트 확률로 안 넘어진다. 설령 헛디뎌도 가볍게 다시 균형을 잡는다. 40대 이상으로 추정되는 손님은 휘청 하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계산대로 다가오면서 친구랑 수다 떨면 거의 100프로다. 그나마 친구랑 같이 있으니 어머어머! 소란 피우며 부끄러움을 무마시킬 수 있지만 혼자 온 여자 손님이 잘못 헛디디면 그 뒤의 무안함을 나와 나누어야 해서 죄송하다. 50대 이상부터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고확률로 헛디디고 넘어지는 정도도 심하다. 그분들이 계산대를 향해 몸을 움직이는 게 보이면 더 먼저 도착해서 빨리 계단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필사적이 된다. 물론 모든 연령의 손님에게 미리 고지하지만 직원보다 먼저 손님이 도착하면 야매 통계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그날, 소리를 못 듣는 여자 손님이 오셨다. 50대 정도로 보였다. 주문할 때 입을 뻥긋 뻥긋하시며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나도 재빨리 알아듣고 오더 기계를 보여드리면서 주문을 확인했다. 맛있게 드시고 나가시려는데 너무도 불길한 예감이 두근두근 심장을 때렸다. 나르던 쟁반을 빨리 내려놓고 계산대로 질주했다. 안돼 안돼. 겨우 동시에 도착했는데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뭘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퍼뜩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급하게 足元気をつけてください!!!소리치고 있었지만 이게 소용없단 걸 알고 있었고 결과가 너무 뻔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여자분이 시야에서 확 사라졌다. 몸 전체가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현관에 내동댕이쳐지듯 넘어지신 것이다. 뒤에 계산하려고 줄을 서려던 여자 두 분이 꺄아!!! 소리 지르며 어떻게 어떻게 발을 굴렀고 넘어질 때 뒤집힌 돈 받는 쟁반이 스테인리스라 쨍그랑탱탱탕탕!!! 요란스럽게 울어 한 순간 가게 안은 난리가 났다. 나는 쩔쩔매며 그분을 부축했다. 어디가 부러졌을까 봐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귀가 들리지 않아도 그분은 모든 주변 공기를 느끼시는 듯했다.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면서 신음을 참고 겨우겨우 돈을 꺼낸 다음 부리나케 나가버리셨다. 계단이 어찌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귀가 안 들린 그분을 위해 나는 그 순간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았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지금도 생각한다. 팔을 갑자기 잡아채는 게 좋았을까. 얼굴 위로 손을 휘적거리면 좋았을까. 밥 먹고 있을 때 나가실 때 조심하라고 메모를 남겼다면 좋았을까. 아니 나는 이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준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로도 한참 멋대로 그분의 일대기를 상상했다. 어릴 땐 청각 때문에 운동을 많이 못했을까? 살면서 또 어떤 어려움과 위험이 있었을까? 얼마나 많이 부끄러운 상황을 겪으셨을까.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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