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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혼자 한국에 다녀왔다.
혼자 가는 한국은 대충 계산해도 10년도 훨씬 넘은 일이었다. 깜짝 놀랐다. 앞으로 하루나 케군을 (달고) 가야 한다는 체념을 하고 있었나 보다. 뜻밖의 기회에 갑자기 기쁨 반, 당황 반이 몰려왔다.
시월 어느 날,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주르륵 연휴가 붙은 주 금요일에 하루가 처음으로 학교에서 일박을 하고 오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재난 대피 연습이었다. 밥도 비상용, 옷가지며 생활 패턴도 재난용으로 체험하고 학교 강당이랑 교실에서 자고 오는 일이었다.
우리 어릴 땐 북한 공습을 대비해서 사이렌 몇 번 울리면 책상 아래 숨는 연습을 했는데 하룻밤 리얼로 자고 오다니. 전쟁이 지진보다 잔혹하지만 지진은 전쟁보다 현실이구나.
나는 가끔 일본인들한테 지진 있는 나라에서 사는 게 좋아요? 전쟁 휴전 중에 있는 나라에서 사는 게 좋아요? 짓궂은 질문을 한다. (이것도 다~ 한국어 연습입니다.) 망설이면서도 모두가 지진이 낫다고 대답했다. 지진으로 사람이 더 많이 죽었는데도요? 말하면 “그래도…. ” 까지 듣고 둘이 까르륵 웃는다. 휴전도 휴전 나름이지… 상대가 러시아랑 북한은 좀.. 이해합니다. 사람을 원망하는 것보다 하늘을 원망하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하루는 금요일에 학교 가서 토요일에 오고 토, 일, 월 휴일이라 아빠가 있고 화요일에 케군이 재택근무를 해 주면.. 어? 나 금토일월화!! 5일간 갈 수 있는 거 아냐? 케군에게 계획을 발표했다. 케군은 2초 생각하더니 다녀와! 쿨하게 반응했다. 얼굴이… 좋아하는 거 같은데..?
하루는 일단 엄마 계획을 듣고 학교에서 자고 오기 싫다고 입이 뾰로통했다. 그다음은 엄마가 며칠이나 없는 건 싫다고 입꼬리가 쑤욱 내려갔다.
학교 숙박체험은 다 하는 거야. 공부보다 더 중요한 연습이야 다독였다. 근데 자고 오기 싫은 이유는 뭘까?
-밥이 맛없을까 봐 그래? 화장실 걱정 돼? 강당에서 자는 거 좀 그래?
-아니… 그건 아닌데…
엄마만 알고 있으라고 털어놓은 하루의 걱정거리는 이거였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뻗쳐있을까 봐 걱정돼.
(허..업…웃참..)
-그럼 얼른 일어나서 화장실 가서 물 묻혀.
-그 물 묻히고 있는 걸 애들이 보는 게 좀 싫어.
-다들 머리 새 둥지처럼 엄청 뻗쳐있을 걸? 막 눈꼽도 끼고?
-챙피해… 부끄러..
(허업.흡…헙..)
하루가 자러 간 뒤 문을 꽁꽁 닫고 퇴근한 케이타한테 말해줬다. 둘이 입 틀어막고 쿡쿡 웃었다.
-아 머리 뻗치는 거 애들이 보는 게 쪽팔리대.
-설마~
-진짜야 개욱곀ㅋㅋㅋㅋ
-ㅋㅋㅋㅋㅋ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결국 하루는 재난숙박 체험에 안 갔다. 학교 설명회에 참가했더니 선생님들이 이런 부탁을 했다. 부디 아이들과 잘 의논해서 본인이 납득한 후에 참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은 다 큰 거 같아 보여도 정말 쪼꼬미들이었다. 첫 외박에 밤새 우는 아이, 옷에 오줌을 싸는 아이, 자다 말고 집에 가겠다는 아이, 못 자고 뒤척이는 아이… 매년 보육원을 방불케 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선생님들은 그렇지 않아도 밤새 불침번을 서며 아침까지 뜬 눈으로 버텨야 하는 날인데 마.. 많이 힘듭니다..라는 텔레파시를 보호자에게 쏘셨다. ㅋㅋㅋ
주변 선배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뭐 딱딱한 바닥에서 자기 싫다는 아이나 일찍 사춘기가 온 여자아이, 예민한 아이 등등 매년 참가 안 한 사람들도 꽤 많더라.
케군한테 난 안 보내도 될 거 같다 말했다. 지진이 있는 나라에서 이런 중요한 재난 체험을 어허! 이런 주의려나? 케군은 어떤 반응이려나? 궁금했는데 케군도 의외로
-응. 자기가 싫다는데 그러자!
쿨하게 반응했다.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케군이지만 아직 케군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는 게 재밌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 이런 조건에서 그 사람은 어떤 가치관과 감각을 가지고 있을까. 또 하나 알아간다. 겪어야 알 수 있다.
-근데 나 비행기 이미 예약 다 했어!! 올 때 갈 때 비행기 다 했어! 취소 못한다!
힘주어 말했다.
-알았어. 내가 금요일에 재택근무하면 되니까 다녀와.
또 쿨하게 반응했다.
좀 좋아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렇게 학교는 안 가게 돼서 마음이 놓인 하루는 이번에 엄마 없는 거 시져.. 가지 마… 하면서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수 틀릴까 봐 동공이 마구 흔들렸는데 그때마다 말을 돌려 어찌어찌 상황을 넘겼다.
그리고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아침에 눈이 번쩍 뜨였고 하늘이 맑고 청량했다! 택시 타고 직행 열차로 갈아타고 나리타에서 짐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하고 면세점을 구경하고 먹을거리를 사서 비행기에 오르는 동안 나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그 수많은 프로세서를 거치는 동안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고요하게. 너무도 고요하게. 그 모든 것들을 해 낼 수 있었다는 희열에 몸이 떨렸다. 가슴에 손까지 얹고 깊은 감격의 한숨을 쉬었다. 하아… 눈물까지 나는 것 같았다.
아침 9시 택시에서 내려 나리타로 가는 직행열차 역 안은 관광객과 가족들로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난 너무나 평화로웠다. 내가 갈 길과 할 일만 머릿속으로 생각할 뿐 입 밖으로 그 계획들을 내뱉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편의점에 들어가서 음료수를 샀다. 커다란 캐리어가 불편하지만 애를 끌고 다니는 것보다 짐을 끌고 다니는 게 백배 나으니 괜찮다. 내 앞에 아이 둘을 데리고 짐을 끌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계산대 차례가 되어 계산을 하고 있었다. 둘째가 엄마랑 형을 못 보고 앞으로 계속 앞서간다. 나는 예상할 수 있었다. 도중에 얘가 엄마랑 형이 없다는 걸 깨닫고 뒤돌아 나랑 부딪히겠구나. 당황한 마음에 그것도 엄청 급하고 서둘러서 부딪힐게 뻔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속도를 늦추고 애기가 급 노선을 틀고 갈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향을 추측했다. 그런 나의 노련함을 애기 엄마는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휙! 하고 몸을 돌리자 나한테 못할 짓을 할 거라 예상한 엄마가 탓짱!! 자마!!!!! (비켜!!!!) 편의점이 울릴 듯 소리를 지르셨다.
전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 뒷모습은 그냥 혼자 여행 나온 애 없는 여자 그 잡채였겠지 후후후. (즐거운 선입견! 우하하하하)
공항에 도착한 후에도 여기저기서 가만히 두면 산산이 흩어지는 구슬처럼 멋대로 가버리는 아이들을 모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늘 입을 닫고 가도 되는 날이다. 하루야! 오른쪽, 왼쪽! 이거 먼저 해야 돼, 저기로 가야 돼, G카운터! 화장실 갈래? 싸 둘래? 진짜 괜찮아? 한 치 앞에 뭘 해야 하는지 계속 쏴대는 닝겐 내비게이션을 안 해도 되는 날이다. 일상이 되어버려서 생각도 못했던 일인데 이걸 안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출국심사를 끝내고 밥을 먹으려다 배가 안 고파서 그냥 편의점 삼각김밥이랑 계란빵 샌드위치, 커피 같은 걸 사기로 했다. 원래 생각이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약국에 들러 언니들 줄 안대 찜질팩이랑 쟈가리코를 왕창사서 가방에 잔뜩 넣었다.
이걸 사면서도 또 생각했다. ‘원래 없던 계획’을 실행하려면 하루한테 그 계획을 설명하고 왜 그러기로 했는지 설명하고 같이 가 줄 건지 물어보고 걔도 납득하면 같이 가서 걔도 먹고 싶어 할 거니까 얘 것도 사주고 하는 공감 대잔치 육아가 또 펼쳐지는데 난 오늘 그것도 안 해도 되는구나.

에어 프리미아 항공기 처음 탔습니다.

비행기 안이 추워서 셔츠 위에 맨투맨 티셔츠를 껴입고 노안용 안경을 쓰고 영화와 드라마를 신나게 보며 왔다. 마릴린먼로의 생애를 토대로 영화화 한 <블론드>를 아이폰에 담아왔다. 근데 점점 야해지더니 찰리채플린 아들이랑 또 다른 남자랑 쓰리썸 장면에서 어머!! 야 너무 야하잖아. 스크린을 두 손으로 감싸듯 몰래 보다가 그게 더 이상해서 다른 드라마로 바꿨다. 왜냐면 내 앞에 앉은 분이 보는 동성애 영화가 내 자리에서 너무 잘 보였기 때문이다. 모두 조심하자. 비행기에서 내가 보는 화면을…. 내 뒷자리 사람이 알고 있다.
옆자리에 일본인 엄마랑 대학생? 고등학생? 모녀가 같이 한국으로 여행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비행기 안이 너무 추워서 옷을 있는 대로 껴입었는데 딸이 맨다리에 핫팬츠를 입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얘 뭐… 담요라도 달라고 하까… 유료일까. 그냥 저 나이에는 안 추울지도 몰라. 오지랖을 덮었다. 엄마랑 딸이랑 해외여행 도란도란 가는 모습이 내내 부러웠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엄마 생각이 울컥 든다.
에어 프리미아 직원은 특이하게 지상근무 직원의 반이 동남아 사람들이었다. 인도나 네팔 느낌의. 영어는 네이티브일 것이고 일본어를 엄청 잘하지만 한국어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한국 항공사인데 한국어는 못해도 되는 조건이라니 조금 의외였다. 그리고 비행하는 직원들은 거의 일본어가 서툴렀다. 일본인에게 이름을 묻는 직원이 경어를 거의 안 쓰고 名前はなんですか? (나마에와 난데스까) 이름이 뭡니까 초급 일본어를 하셨다.
보통은 お名前、伺ってもよろしいですか?(오나마에 우카갓떼모 요로시이데스까?)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정도는 기본 써야 한다. 서비스직의 기초 일본어라고 생각한다. 20년 전에 BJT 시험 까지 보면서 일본 취업전선에 있었던 나. 뭐였지. BJT는 비지니스 일본어 테스트라고 모든 문제가 경어 잘 쓰는 법이었다. 우리 사장은 낮추고 거래처 상대방 잘 높인 말투는? 이라던가, 최대한 빙빙돌려 잘 거절한 건 다음 중 무엇? 최고로 사람 듣기 좋게 말한 보기를 고르시오. 이런 거였다. 일본어 뿐만아니라 높임말 뉘앙스까지 시험치며 따지던 라떼 시절…
항공사 직원이 되려면 외국어 실력이 넘사벽이어야 했는데 다 옛날 말이 되었나 보다. 개인적으로 외국어는 손님이 배워서 필요한 걸 찾아먹을 테니 지금처럼 저가 항공 계속 출항해서 가격경쟁해서 피 터지게 싸워서 싼 표 많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특히 이제 일본인들은 어딜가든 일본어를 조공하듯 해 주는 시대는 잊어야 한다. 니들이 영어를 배워!
세관 신고서를 나눠주는 직원이 일본인을 척척 알아보고 일본어 종이를 배부하고 있었다. 내 옆자리 모녀에게도 일본어로 안내하며 종이를 주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한국인에게는 필요 없는 종이였다. 직원 손은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고 눈은 ‘넌 뭐…. 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무인양품 셔츠에 유니끌로 바지를 입고 있어서 그런가? ㅋㅋ 나는 한국에서 돌아다니면 한국인 같고 일본에서 돌아다니면 일본인 같은데 이렇게 국경 사이에 있으면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외모인가 보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데리러 온 써네언니를 만났다. 냉큼 차에 올라타 이 넓은 인천공항에서 뙇 만난 게 오늘 날씨처럼 시원했다.
확 뚫린 6차선 대로와 미래도시처럼 솟은 아파트들도 시원했다.
한국에 혼자 오는 게 십 년 만이라니까 언니가 믿기 힘들어했다. 왜냐면 나랑 둘이 이렇게 수다를 떨던 게 꼭 며칠 전 같아서였다. 나도 이 느낌이 익숙해서 깜짝 놀랐다. 나는 지금 스무 살 때 그 모습 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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