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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가는 길이었다.
출근길 피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사람들 발걸음에는 여유가 없었다. 정확히 계산된 속도로 한치의 변수를 허용하지 않는 결의에 찬 자세들이었다.

구로디지털 단지로 출근하던 서른의 나도 그랬다. 게다가 우리 회사는 8시 30분에 업무시작이라 1분이라도 더 잠을 자기 위해 출근에 필요한 이동 시간은 극도로 빡빡했다. 중간에 생각지도 못한 돌발 상황이 생기면 바로 지각의 나락. 출근길에 정신 집중이 필요한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어폰으로 크게 노래를 들으며 세상과 단절한 채 빠르게 걸었다. 하루는 어떤 중년 여성이 차가 고장 났는지 길거리 사람들에게 애원하듯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말을 걸었다. 사람들은 마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피해 갔다. 그중에 나도 있었다. 여자분은 아무에게도 안 보이고 아무에게도 안 들리는 떠도는 유령 같았다. 오랫동안 그 모습이 머릿속에 남았었다.

출근 길이 싫어서 회사는 못 다니겠다는 친구가 있다. 좀 덜 살았다면 고작 그것 때문에냐고 의아했겠지만 이제 너무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출근길에선 아무도 의지할 수 없다! 그 어떤 상황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냉정한 진리를 오래전에 깨달았다. 일본에서는 출근길 전철 트러블이 일어나면 인터넷에 심심치 않게 매정한 속내를 읽을 수 있다.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그걸 왜 하필 출근 시간에 하느냐 같은 내용이다. 만약 치한을 만나도 이 전철을 멈추는 게 죄송스러워 말 못 하고 참는 사태도 은연중에 많을 것이다. 어떤 미친놈을 만나도 출근길엔 트러블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투명인간 취급을 하게 된다. 평소라면 신고를 하던지 대놓고 뭐라 할 텐데 그냥 못 본 척 안 들리는 척. 친구가 일본애들은 스트레스를 출근길 전철에서 푸는 것 같다며 세상 별 미친놈은 출근길에 다 봤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문제 삼을 수 없다. 출근길이기 때문에.

어쨌든, 바쁜 사람들 사이에 한 남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가방을 떨구고 있었다. 근처 대학생 같았다. 가까이 가 보니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17년 일본 생활로 터득한 질문 스킬을 던졌다.
일본 사람들은
괜찮으세요!!!???(다이죠부데스까?)
하면 열이면 열 괜찮아요 (다이죠부데쓰)
하고 대답한다. 이게 조건 반사 같은 건데
긍정과 부정만 선택할 수 있는 질문이 오면 몸이 긍정문을 선택해 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도움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함정에 빠진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손가락 베었어요?
그러면 베었는지 아닌지만 말하게 되어있음.
-아뇨. 코피가 났어요.
코피를 양손으로 받아냈는지 손이 피로 범벅이 돼서 가방을 못 매고 갈 길을 멈춘 것 같았다.
하필 가방 안에 아무것도 없었던 나.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요.
바로 옆에 있던 약국으로 달려가 휴지를 하나 집었다.

그런데 하필 내 앞에 할머니가 지갑에서 동전을 하나하나 꺼내 금액에 딱 맞게 세고 계시는데 그 동전 지갑 지퍼는 왜 이렇게 안 닫히는지 아…. 카드나.. 전자머니 없으실까요. 천년만년 시간이 걸리고 나는 조금씩 조금씩 줄 간격을 줄이며 초조하게 계산을 기다렸다.

…그때. 그 순간.
나 좀 빨리 사겠다고 온몸으로 재촉하는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사람을 돕겠다고 휴지를 사면서 앞사람이 다 느낄 정도로 불쾌하게 구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내 오지랖은 그냥 사람들을 다 치고 지나가는 커다란 골칫덩이처럼 느껴졌다. 할머님은 내 안달 난 기척을 못 느꼈을 리가 없었다.

한참 걸려 휴지를 사서 학생한테 돌아가니 이미 다른 행인에게 휴지를 받아 들고 있었다. 부끄러움 게이지는 한층 치솟았다. 학생은 감사하다고 몇 번을 꾸벅이고 제 갈길을 갔다. 애초부터 내가 휴지를 들고 다녔다면 좋았을 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휴지를 들고 다니고 있다.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기분에 취하지 말자. 정말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그 누군가만이 아닌 도중의 모든 이를 곤란하지 않게 도와야겠구나.

그런 일이 있었음.

긴자 연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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