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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연습해서 먼 훗날 여행가면 거기 사는 분들이랑 조금이라도 대화 할 수 있겠지? 영어 공부의 결실이나 재미 같은 건 아주 나중에 찾아 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왜 필리핀 선생님들의 존재를 간과했을까. 이미 선생님들과 소통할 수 있고 그 재미는 눈 앞에 있었다.

존이랑 카오리랑 썸 타면서 사내 연애 시작 할락 말락하는 책으로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사내 연애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좋다고 생각해요 -했다. 선생님 성격엔 반대였는지 깜짝 놀라면서 왜요?? 물으셨고
I think love is everywhere.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항상 사랑에 준비 된 여자였짘ㅋㅋㅋㅋㅋㅋ
선생님이 그러다 헤어지거나 잘 못 되면 어떡해요? 물어서 Time is the best solution.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풉 웃었다. 그리고 아이 노우~~ (내가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이건 듯..) ‘구체적으로는 전달 받지 않았지만 니가 어떻게든 하려는 말이 무언인진 느낌적 느낌으로 아이노우 해~~’ 자주 하신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미리 철벽치는게 더 어리석다고 생각함. 생각보다 인연과 찬스는 그렇게 많지 않다. 결혼하고 보니 더욱 느낀다. 나는 내가 어딜가나 남자가 줄줄 따르는 미인이거나 누구나 탐내는 조건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기회가 올 때 잘 잡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어릴 때부터 빨리 감을 잡은 편이 아닐까 싶다. (선생님과 이 대화를 하며 최근에 느낌)

이렇게 작은 내 이야기를 하는데도 내 성격과 삶의 방식을 영어로 전하는 것이 재미졌다.
필리핀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봤다. 더더 이야기를 듣고 싶고,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이야기가 더욱 기억에 남기도 하니까.
(선생님) 오늘 저녁은 뭘 먹었어요?
(관심병나) I ate manok! Is manok chicken right?
치킨이 필리핀어로 뭔지 찾아봤다.
치킨을 필리핀어로 마녹이라고 하는걸 어떻게 알았냐며 선생님 너무나 좋아하시고~~ 반대로 필리핀에선 가장 유명하고 많이 먹는 한국 음식은 잡채, 불고기 아니라 삼겹살이었다! (오 신기해… 제일 심플해서 그다지 어필 못할 것 같이 생긴 음식인데..) 그리고 냉면이나, 냉소면, 냉소바 같은 차가운 음식이 없다고 한다. 찬음료나 아이스크림은 있는데 음식 중에 차가운 게 없단다. 기온이 높은 나라인데 의외네

한 번은 선생님이 책 내용대로 ‘당신은 매년 엄마 생일에 선물을 주나요?’ 라는 질문을 했다.
“I wanted that. But when she lives i was poor. When i had money she is gone.”
엄마도 우리 생일을 챙겨주는 건 미역국이 최대한이었고 용돈이란 시스템이 우리집에 없었으니 우리끼리 돈을 모아 엄마 선물을 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드디어 대학 졸업반에 취업도 확정됬는데 그 해 8월 엄마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내게 돈이 생겼을 때 엄마가 거기 없었다.
이 대답이 끝나자 화면 속 필리핀 선생님은 손을 뻗어 손수건을 가져다 눈에 대셨다. 오매 ㅜ..ㅜ 나으 구린 영어가 마음에 닿았다…? 촉촉한 목소리로 선생님도 18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솔직히, 18년 전에 돌아가셨단 말인 거 같기도 하고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둘 다 엄마 없는 딸이란 사실이, 매일이 생일인 것처럼 뭐든 사 줄테니 엄마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그 마음이 영어로 통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어느날의 피드백에 나보고 중급자라고 그랬다. intermediate래 이 단어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사실 아직 잘 못 외움… ) 피드백 받고 이게 뭐지? 하고 사전 찾아 본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중급… 중급의?? 중급자!!!! ??? 내가??? 비기너, 초급, 입문자, 베이직, 이런 말을 들어도 황송했던 내가!! 내게 딱 들어 맞는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 잘도… ) 영포자! 나는 영포자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근데 그건 일그러진 잣대로 날 함부러 재고 깎은 말이었다. 문법은 구멍 투성이여도 다른 기준으로 재면 나도 중급자였던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나는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숙제’ㅂ’)

길면 그냥 시야에서 접수 불가였던 영문도 한 번 천천히 읽어 볼 마음이 생겼다.
이퓨… 플러쉬 (이거 화장실 물 내리는거지) 어 롯오브 (요건 많은거지) 페이퍼 앳 원스 (아, 한번에~ 할 땐 앞에 앳을 쓰는 구만) 더 토일렛 메이 겟 클로그드. (클로즈랑 비슷한 것이.. 뭔가 막히고 닫히고 이런 늑낌? ) 플리즈 유즈 잇 화일 플로잉 (이것도 물 내릴 땐)잇 리를 바이 리를 (쪼끔씩 쪼끔씩?) 위 어팔러자이즈 (아 이거 미드 볼때 맨날 나오는 사과한다는 말! ) 포 인컨바이니언스? (이건 일본말을 봐야겠군. 음. 봐도 모르겠군. 패쓰) 커즈드 (음 이것도 세트로 모르겠군) 바이 더 올드 라이브러리 쌩큐. (암튼 우리 도서관이 낡아서 미안하다는 거겠지? 물 내릴때 막히니까 휴지 조금씩 흘려보내라는 거고?)

사과한다는 말이랑, 리를 바이 리를을 알아들어서 매우 기뻤다.

그리고 굉장히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한국어 수업에도 엄청난 진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까맣게 잊었던 외국어 학습자의 어려움을 새록새록 다시 생각했을 뿐더러 이번에는 정말 고정관념을 깬 새로운 잣대를 여러 책에서 배우고 나는 다시 한국어에 대한 생각도 고쳐먹었다.
<단단한 영어공부> 라는 책에서 이런 말도 나왔다. 네이티브의 윤리라는 표현.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완벽한 문법 완벽한 발음을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네이티브’라고 하는 사람들은 평가해주기는 커녕 (특히 영어에 한해서는) 처음부터 기대를 너무 한다는 것이다. 자기네들은 그저 우연히 그 나라에 태어나서 별로 노력도 없이 얻은 그저 의사 소통의 수단이면서 말이다.
아이고. 정신차려보니 우연히 한국에서 태어난 것 뿐인 주제에 한국말 좀 나불거린다고 한국어가 무슨 벼슬인 양 나는 왜 학생들한테 더 관대하지 못했나. 당황했다. 내 모습 아닌가?
그리고 내 한국어 수업은 진심으로 학생을 향한 경이로움으로 가득해졌다. 아니 일본에서 태어난 분이… 어떻게 한글을 읽고 쓰고 이렇게까지 가능하단 말인가요. 갑자기 너무 기특하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칭찬도 많이 나오고 내 설명이 훨씬 간결하고 또박또박해 진것이다. 학생분께서 한 마디 회화 하는 것도 마음의 준비가 많이 필요한 분이셨는데 갑자기 한국어로 대화를 많이 하시게 됬다! 나도 모르게 그 동안 말이 너무 빨랐던 것이다… 책에서 말한대로 ‘네이티브’는 모국어가 아닌 학습자에게 더 천천히 배려있게 말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말해준 덕분이었다.

위 그림은 학생분이 어떤 책을 소개해 줬는데
‘히타히타 카나시이’ 한 내용이에요. 이걸 한국말로 뭐라고 하면 될까요. 물어서 함께 찾아보는 중이었다.
뭘까요? 아주 얕게 계속 슬픈 느낌인가요? (바닥에 얕은 눈물을 밟고 서 있는 느낌의 그림을 그림)

더 깊은 슬픈 느낌이라고 하심. (아주 바다처럼 가득한 슬픔의 바닥에 푹 꺼져있는 그림을 그려 봄) 아니라고 하셔서 더 이야기 한 끝에 아주 깊은 슬픔을 위에서 쭈그려 내려다 보는 그림을 그림. 학생은 이게 가장 비슷한 느낌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기어가다. 라는 단어를 가르쳐드림
학생은 한국어 회화능력도 수직상승했고 자기 이야기를 진짜 많이 하시게 되고 다음엔 언제 또 말 할 수 있어요? 하며 의욕적으로 스케쥴을 잡으셨다. (그동안 제가 너무 못했네요ㅠㅠ 죄송했어요…)

영어로는 영포자네, 영알못이네, 이런 말을 들으며 살았지만 사실 나도 어느 언어의 네이티브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 그것에 눈을 떴다는 것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친구가 성문 영문법을 통으로 pdf파일로 만들어 줬는데 (세상 진짜 좋아졌다!!! 가 아니라 이걸 가지고 있는 너 정말 특이해!!!! 이게 첫 감상이었음 ㅋㅋㅋ) 내가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1번 이었다. trees를 논하면서 왜 품사를 말하래. 나무냐 나무들이냐도 아니고 이것이 명사라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 어릴때 너무 숨막혔다. 품사는 그렇다 쳐도 영문법은 진짜 갈 수록 .. 너무한다. 특히 to 부정사.. 이걸.. 왜 다 쪼개서 명사적 용법 부사적 용법 형용사적 용법으로 단원을 나눠가지고 배를 갈라 해부하고 난리가 났냐고. 그 문장을 이해하면 되는 거잖아…(일본어는 이렇게 변태적을 배우지 않음. 확실함.)
그나마… 뭐… 다시 보니.. 1번 빼곤 문장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못 푸는 문제이니 납득이 좀 갔다. 내가덮어놓고 싫어했던 성문법에 납득과 이해를 하는 날이 오다니… 음.. 묘하게.. 공부 잘하는 사람의 기분이 된 느낌은 뭘까. 우등생이나 모범생에 대한 동경심도 강했는데 그런 게 살짝 충족되었다.

이것도 영어에 대한 대박 의외의 재미.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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