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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엄마는 언니와 나를 데리고 불행한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가 6학년 때, 중3이던 언니가 고등학교 진로를 결정하는 시기였다. 전교 5등 안에 들던 언니는 인문계에 가고 싶었고 엄마는 그럴 돈이 없었다. (정확히 말해 대학을 보낼 돈이 없었다. ) 엄마랑 언니가 진로 희망서를 두고 3일 내내 울었던 걸 기억한다. 기생충에 나오는 반지하 같은 단칸방에 셋이 살면서 (기생충 반지하 화장실이 너무 넓고 방이 많아 대박 좋은 집이네 생각했음) 한 달 한 달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던 걸 나보다 철이 일찍 들었던 언니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공부 욕심이 많았던 언니는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3일이나 울며 매달려 본 것이다. 엄마는 미안하다 이틀을 울고 3일째엔 급기야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며 같이 목매달아 죽을 거냐며 화를 냈다. 철없고 진짜 머저리처럼 멍청했던 나는 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하진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언니가 못 간 인문계를 내가 갈 리가 없다는 거. 그 후로 쓸데없이 필요 이상 공부를 잘할 이유가 없었다. 적당히 창피하지 않고 적당히 눈에 띄지 않고 적당히 힘들이지 않을 정도의 성적만 냈다. 일부러 완급을 조절한 것은 아니다. 한문, 사회, 윤리, 역사, 국어 따위는 그냥 외우면 되는 일이니 고단할 게 없었고 대충 그런 과목들로 평균을 채우고 나면 영어나 수학을 이해하려고 영혼을 깎아 낼 필요가 없고 어려우니까 버렸던 것이다.

약았다기보다 개인적으로는 저전력 모드의 삶을 추구한다고 표현하고 싶군요. 본능적으로 필요 이상의 일은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대학 때도 졸업 가능 한 단위만 딱 채웠고, 운전면허 기능시험 때도 기어 변속을 잘 못하니까 그냥 그 구간을 액셀로 밟고 패스했다. 그 부분의 감점을 머릿속에 넣고 다른 데서 점수를 채워 합격한 것이다. 기어 변속을 못하는 2종 수동면 허가 말이 되냐고. (이제 이런 종류 면허는 없어졌죠? ㅋㅋ제가 좀 옛날 사람이라) 집안 인테리어나 생필품도 꼭 필요한 것만 사고 나중에 쓰겠지 쓸 수도 있어 라며 쟁여 놓지 않는다. 대학을 안 갈 건데 대입시험에 필요한 영어랑 수학을 머리 아프게 투쟁하며 배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인생 자체가 궁극의 미니멀 라이프. (묘하게 빠져들죠?)

이것까지 계산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언니와 다르게 특출나게 공부를 잘하는 딸이 아닌 나는 별 고민도 없이 상고를 선택해서 누구 하나 가슴 아픈 사람 없이 진학했다. (지금 생각하니 효도 아닌가 캬) 내가 느낀 상고 학창 시절은 아무도 우리에게 영어를 잘하라고, 필수 과목이라고, 꼭 하라고 압박하지 않았다. 무역영어만 달달 외우면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놀기만 하지 않아요. 영어나 수학보다 하나라도 더 컴퓨터 자격증을 따는 게 중요했고 나름 바빴다. 주산하다 빡치고 엑셀 함수 외우다 성내고) 그러니 잘 못하는 영어나 수학을 극복하려는 절실함이 없었다. 그냥 사회나 체육처럼 하나의 교과 과목이었을 뿐이다.

조금 피해의식으로 똘똘뭉쳐서 못된 말을 하자면, 영어를 힘들게 배웠다. 영어 하느라 애먹었다. 고생했다 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꼭 배워야 할 환경이라는 것이고 대학에 갈 돈이 누군가에 의해 준비돼 있는 사람들이니까 하는 말인 거다.

엄마의 바람대로 차례로 상고를 졸업 한 언니와 나는 스무살에 취업을 해서 매달 꼬박꼬박 100만 원씩 집에 월급을 드렸다. 정말 가난하던 우리 집은 드디어 숨통이 트였다. 유니폼을 입고 보험회사 창구 업을 하거나 작은 회사 여직원을 하는 동안 영어는 단 한마디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진득하지 못한 나는 여기저기 이직을 하고 툭하면 직장을 그만뒀는데 늦게 사춘기가 온 건지 이제 와서 자아를 찾겠다 정체성 고민을 한 건지 아무튼 뭔가 더 의미 있고 뚜렷한 직업을 갖고 싶어 백수생활도 좀 하고 그랬다. 그 무렵 살림이 나아져서 우리가 엄마한테 준 돈은 차곡차곡 딸들의 이름으로 저금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탓도 있다. (일명, ‘시집갈 돈’) 나도 정말 못됐지. 알고 나니까 살금살금 엄마한테 주던 돈 꽁무니를 뺀 것이다.

같은 여상 출신의 동창 친구들이랑 천호동 포장마차에 모여 술을 마셨던 밤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는 백수로 놀고 있고, 두명은 증권 회사에 한 명은 고모네 옷가게에 한 명은 어느 작은 중소기업에 취업했었다.
"내가 뉴스에서 장애인 취업이 힘들다는 걸 봤거든. 장애인이라고 서류도 못 넣고 면접도 안 봐주고 합격해도 승진도 못하게 그냥 차 심부름만 한대는거야. 근데 왜 이렇게 내 얘기 같냐? 상고 나와서 받는 취급이랑 똑같아. 그냥 병신 같아. 우리도 반 병신 같아."
술이 잔뜩 올라 토해내는 말이었지만 조금은 진심이었다. 우린 말 없이 올록볼록한 포장마차 휴지로 연신 눈물을 닦았다. 바로 직전까지 다니던 보험회사에서의 일이었다. 내가 속한 본부 과장님은 본사에서도 탐내는 유능한 분이었다. 다들 말했다. 역시 서울대 출신은 다른 거 같아. 과장님 판단력은 정말 놀랍지 않아? 하지만 난 신입 때부터 바로 옆에 붙어있는 강남 영업부 사원님이 더 대단해 보였다. 50대 정도로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직함이 딱히 없었다. 00 씨도 굉장하지 않아요? 모르는 게 없으시던데? 모든 약관과 전례와 보험 요율이 척하면 딱 나오셨다. 난 모르는게 있으면 항상 그분께 물어봤다. 그게 제일 빨랐기 때문이다. 왜 평사원이냐고 물었더니, “상고 나오셨거든 승진시험을 봐도 승진이 안돼”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회사 갈 맛이 안 났다. 내가 야망에 넘치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본다고. 대충 다니다 시집이나 가면 땡큐인 인생관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뒤늦은 사춘기였던 거 같다.
그뿐인가 내가 모르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세상 사람들은 공고 상고 출신인 사람들을 날라리 일진으로만 보고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학교는 안 가고 뒷골목에서 담배 피우고 어린애들 삥을 뜯고 건들거리는 머리 나쁘고 위험한 애들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있었다. 늬들이 열심히 공부했으면 그런 학교에 안 갔지 누구 탓을 해라는 눈빛. 우리 학교에 걸핏하면 학교 안 나오고 잠만 자던 애들은 없었다. 오히려 경찰이나 담임이 부모님을 불러오라는 일을 저지른다니 상상만 해도 불쌍한 우리 엄마 아빠 생각에 눈물 지을 애들이었다. 참, 우리 반에 재은(가명)이라는 친구가 유일하게 일주일에 두어 번 학교에 못 오고 출석해도 내내 잠을 자는 애가 있었다. 아빠는 어릴 때 돌아가시고 남자랑 엄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초등학생 쌍둥이 동생들을 키우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롯데리아 아르바이트하는 애였다. 담임선생님은 모두가 협력해서 얘를 등교시키기로 하셨고 우리는 당번을 정해서 아침마다 돌아가며 일어날 때까지 재은이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한 번은 나랑 친구들이 재은이 일하는 롯데리아에 일부러 햄버거 먹으러 갔는데 얼마나 일을 했으면 포스 입력을 화면 보지도 않고 누르고 한 손으론 손님 잔돈 거슬러주고 한 손으론 음료 서빙하고 배로 포스 돈통을 미는 롯데리아 생활의 달인이 되어있었다. 재은이가 졸업식 날 졸업하면서 선생님 친구들한테 고맙고 미안하다고 엉엉 울었다. 그렇게 힘겨운 졸업을 해도 재은이의 생활기록부는 결석 투성이에 최하위 성적 상고 졸업생이니 곱지 않은 사회의 시선만 받았을 지도 모른다.

천호동 포장마차에서 다 같이 서러워한 친구 다섯 중 번지르르한 증권 회사에 취업했지만 일은 누구보다 잘해도 전화받는 것 밖에 못한다는 친구 두 명은 야간 대학교에 진학 해 직장 다니면서 대졸자가 되었다. (그 후 그녀들은 과장 자리까지 올랐다) 고모 옷가게에서 일하던 친구는 중국에 유학을 갔다. 나랑 중소기업 다니던 친구는 일본으로 왔다.

어쨌든, 일본으로 온 나는 (여기서 드디어 다시 주제로 돌아오자면 )또 영어를 잘도 피했다!! 일본 대학은 영어가 필요 없었다. 영문과가 아니고 국립대가 아닌 이상 말이다. 일본 유학시험과, 일본어 능력 시험만으로 입학이 가능했다.
그래서 4년대를 나왔지만 영어를 못했다. 일본에서 취업을 할 때도 영어는 거론되지 않았다. 해외여행을 가도 일본 사람인 척하면 (필살기) 어떤 관광지에서든 상대편이 일본어로 서비스를 해 줬다.

문득... 여기까지 쓰고 옛날 생각을 하다가 글을 저장하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우리 집이 가난해서 엄마가 집안 사정이 어려워도 공부를 열심히 시키는 부모가 아니라서 내가 영어를 이렇게 못할 수밖에 없었다니 다 구질구질한 핑계고…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 없다고 해 놓고 심각한 상처가 있었다는 것.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영어를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 처했던 사람들에게 느끼는 부러움이 항상 있었다는 걸… 실업고 출신이 이렇게까지 다른 대우를 받을 줄 모르고 사회에서 느꼈던 현실들이 크고 작게 내게 상처가 되었던 것을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실업고 안 갔을 텐데 그럴 선택지도 내게 없었으니까.. 이렇다고 누가 내게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모르겠다 그렇게 철없던 내가 듣고도 알았을지. 그냥 항상 의존적이고 내 인생은 부모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믿었던 그 시절의 철없음이 안타깝다… 뱅글 뱅글 도는 생각들. 그리고 너무나 단순히 나는 머리 싸매고 무언가 알아냈을 때 희열을 느끼는 공부 좋아하는 성향도 아니었다. (일본 대학이 영어가 필요 없다는 걸 알았으니 내가 갔겠지...) 이렇게 뭘 배우는 걸 싫어하는데 좋아하는 전공으로 대학을 나왔다는 게 행운이다 싶다. (의식이 그저 흐른다..)
대학 콤플렉스는 일본 대학을 오면서 많이 해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더불어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도 끈질기게 날 따라다녔고 실업고에 대한 상처도 이 글을 쓰며 처음으로 알았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대졸자인데 영어를 못해 - 이상한데? - 아 실업고 출신이야? - 놀았구나. 라는 결론이 유추되는 것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최선이라 믿고 살아왔던 것 뿐인데. 그 시선이 상처고 억울해서 영어를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Whatever!
나는 느리지만 제 힘으로 진학을 했다. 서른이 다 되어서야 겨우 대학이란 건 다른 나라에도 있고 세상엔 공부를 해서 돈을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이란 것도 있고 돈 벌다가 대학을 가든, 대학을 간 다음에 돈을 벌든, 순서야 상관없다고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깨달았다. 실업고등학교를 진학한 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후회도 필요없다. 나는 왜 그리 은연중에 계속 스스로를 탓하고 부끄러워했을까.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효도였다... 나까지 공부한다고 떼썼으면 우리엄마 억장 수십번은 무너졌을테니까...

우리가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없이 태어났지만 (철없는 성격 포함) 다행히도 꽤 많은 일을 깨닫고 극복하고 스스로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자력으로 이루어낸 일들에 포커스를 맞춰야지. 영어처럼 재미 대가리 없는 공부를 노력해야만 하는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인생에서 배제되어 가던 내 삶. 그게 지금까지 선택할 없었던 환경이라면, 이제부턴 스스로 영어를 내가, 손수, 아주 영광스럽게, 공부하여 주겠다고 윤허해야겠다. (발상의 전환 자연스러웠어… 묘하게 빠져들죠?) 옛날 생각. 그만하자. 그만해. 그래도 너무 속이 시원하다. 엄청 뻥 뚫린 기분이다.

생각해보니, 영어에 대해 별스럽게 애써 본 기억이 없어서 지긋지긋해져 본 경험도 덩달아 없다는 게 행운이 아닌가. 인연이 하도 없어놔서. 악연이지도 않다는 게.
Nice to meet you.
잘해봅시다 영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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