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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엄마 내일 일찍 도서관 가서 공부할 거니까 일찍 깨워줘. 아 그리고 학원에서 문제집 사서 오늘 풀고 숙제로 내야 돼. 학원 가서 문제집 사고... 도서관 갔다가... 밥 먹고 학원 갈게.”
다음 날
A.M 8:30
하루를 깨우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A.M 10:00
하루가 아침을 먹고 TV를 보다 집을 나섰다. (이럴 거면 왜 8시반에 깨워달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내 맘 같지 않다.) 금새 닫힌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뭘 잊어버리고 갔나. 나는 방금 일어나서 아침 먹으려고 굽고 있던 프렌치토스트 불을 줄이고 현관에 쫒아갔다.
“어떡해.. 이거 어떡해...”
어제 입었던 바지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빼낸다. 그리고 다시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어리둥절한 채로 나는 아침밥을 이어서 만들었다.
또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엔 엉엉 통곡을 하며 들어온다. 심장이 철렁했다. 그런데 이유를 물어도 대답 없이 울기만 한다. “우리 애기 무슨 일일까... 왜 그랬을까..” 가방을 내려주고 신발을 벗겨주고 품에 안아 거실에 같이 들어왔다. 프라이팬의 불을 끄고 빵을 그대로 뚜껑 덮어둔 채 나갈 채비를 했다.
그동안에 조금 진정했는지 이런저런 사정을 말한다.
“어제 도서관 자습실 이용권 있잖아. 그 번호표를 모르고 집에 가지고 와 버렸어.... 이걸 돌려줘야 되는데...”
하루의 심정은 이랬다. 아침에 꾸물거려 예상한 시간보다 집을 나선 시간이 늦어졌다. 벌써 공부 시간을 절반 써 버린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그런데 도서관 이용권을 잘못 가지고 온 걸 사과해야 하는 것도 무섭다. 혼나면 어떡하지. (그러고 있는 날 누가 알아보면 어떡하지?) 학습지 사는 동안 자전거는 어디다 세워두지? 거기 다 자전거 못 대는 구역인데.. 그러는 동안 시간은 점점 없어질 거 같아 짜증 나...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A.M. 11:00
세탁기 안에 널지 못한 빨래를 그대로 둔 채 자전거 열쇠를 가지고 하루랑 나섰다. 하루를 먼저 도서관에 보내고 나는 학원 쪽으로 헤어졌다.
A.M 11:05
가는 길에 헌책방에 들러 팔려고 모아둔 책을 맡겼다.
A.M 11:10
학원에서 문제집을 한 아름 샀다. 박스에 들어있던 새 책을 뜯어주셨는데 귀퉁이가 접혔다며 새로 다른 박스를 꺼내셨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쓸게요.”
”아이. 그래도 새 책인데요. “
“애들 손에 들어가면 하루 만에 다 엉망이 되는데 괜찮아요.”
한사코 접힌 걸 팔 수는 없다며 빳빳한 문제집을 쥐어주셨다. 허허.. 책에 줄 긋고 사자마자 평평하게 쫙 눌러 피는 내가 좀 무딘 건 맞지만 책 상태 애지중지하는 사람의 심정을 잘 모르겠다.
A.M 11:15
헌책방에 다시 갔다. 빠르게 감정이 끝나 있었고 1440엔을 쳐 주셨다. 꽤 좋은 값으로 팔았다. 자기가 읽던 책을 처분하는 대신 판 돈의 일부를 하루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다. 이걸로 조금 기분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부모 돈으로 책을 사고 책은 책대로 재미있게 보고 그 책을 팔은 현금을 다시 돌려받는다니 밑천 하나 안 들고 장사하는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다. 그래도 책을 통해 지적 재산이 쌓였고 나는 집 안 정리를 할 수 있으니 나한테도 손해는 아니다.
A.M 11:20
도서관에서 아이랑 합류해 문제집을 건네줬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헉헉 대는데 엄마... 목말라... 한다.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다시 계단을 내려가 자판기에서 찬 보리차를 뽑아다 줬다. 그리고 드디어 학원 숙제를 무사히 끝내 걱정 하나를 덜었다. 도서관 직원에게 뭐라고 말하면서 돌려줘야 하나 근심 가득했던 이용권도 대신 가서 가볍게 반납했다. 실수로 이용권 가져가는 사람이 많은지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원래 어른들한테 이것저것 주문도 잘하고 도움도 잘 받는 아이인데 오늘따라 왜 이걸 어려워했을까...
A.M 12:30
같이 동네 빵집에 들어가 첫 끼니를 먹었다. 오래전에 당이 바닥을 쳐서 샌드위치를 들어 올린 내 손이 떨렸다.

빵을 다 먹고 빵집에서도 남은 공부를 시작한 하루가 갑자기 짜증을 냈다. 해답지를 안 가져와서 채점을 못 한다며 “아!! 이제 이건 못 하겠네!!!” 있는 대로 성질이다. 안 가져온 건 본인이 덜렁거려서 그런거잖음?? 이생키가 보자 보자 하니까 어디 고마운 줄 모르고 복에 겨워 지랄로 축제를 하네. 근엄하게 한 마디 했다.
"작작 좀 해라. 별 것도 아닌 일로 혼자만 드럽게 억울한 척 그만하고. "
약 잘못 맞아 헤까닥 미친 것 같던 눈에 사악한 기운이 살짝 걷혔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어깨를 감싸 안아 토닥이며 위로했다. “이렇게 뭘 해도 잘 안되고 운이 안따르는 것 같은 날엔 아무것도 하지 마.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집중력도 인내심도 떨어진 거야. 그런 날엔 엄마가 도와줄게. 하루는 어떻게 생각해?”
“응... 그런 거 같아...”
순딩한 눈에 눈망울이 맺힌다. 아까 책 판 돈이라며 1000엔을 쥐어줬다. 440엔은 인건비로 엄마 주머니에 들어가실게요. 오늘 아침 갑자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 품삯을 받았다. 돈 받고 활짝 웃는다. 위기를 모면했다. 우리 애기가 오늘은 이 생각 저 생각에 과부하가 왔나 봐. 아직 애기네. 아직 애기야.
P.M 14:00
하루는 학원에 가고 나는 집으로 와 토스트를 반찬통에 담았다. 세탁기의 빨래들을 널었다.

이제 오늘은 아무것도 못 하겠다.
하루 종일 기분이 엉망이진 않을까 집중은 잘했을까 아이 걱정을 했는데 학원 갔다 집에 오자마자 우당탕탕 들어오며 발랄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엄마!!! 눈 감아 봐! 뜨랄 때까지 뜨지 말고 있어 봐!!!”
오! 뭔진 몰라도 목소리가 너무 쾌활해서 그냥 뭐든 다 감사해라. 응응. 알았어. 엄마 잘 눈 감고 있어.
하는 내 손에 학원 쪽지 시험을 쥐어준다.
“이제 눈 떠! “
만점을 받아왔다.

“잘했다. 하루 너무 멋지네. 잘했다! 우아!!!”
한참을 칭찬했다.
“이제 기분은 괜찮아??”
“응? 응! ”
뭔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생각났다. 하는 것마다 잘 안 되던 오늘 시험 만점을 받아 오는 게. 인생은 참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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