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품절 대란이라던 국중박 (국립중앙박물관의 준말이 입에 착착 붙어) 소주잔을 가지고 홍이가 왔다. 십 년 만에 도쿄에 왔다. 하도 통화를 많이 해서 그냥 어제 본 친구처럼 편하고 좋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내가 맨날 가는 슈퍼에 길가에 가게에 우리 집 앞에 홍이랑 같이 걷는다는 게 일일이 벅차올랐다.


케군에겐 얼굴이 얼큰하게 달아오르는 소주잔
나한테는 책들이랑 파운데이션 퍼프랑 속옷이랑
하루한테는 김이랑 파자마를 이고 지고 가져와줬지만 내가 하루 파자마를 보자마자 이건 내가 입어야겠다고 뺏는 바람에 하루가 홍이 이모가 정말 자기건 김밖에 안 줬냐고 홍이의 사랑을 의심했다. ㅋㅋㅋㅋ 김이라도 감지덕지 받아야지. 항상 일본 오는 내 친구들이 퍼줬더니 배은망덕해졌네 이좌식.



우리가 십 년 만에 만나 같은 거리를 걷다 느낀 것.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가 너무 작고 아담해서 이거 맞아? 진짜 이거 유명한 그거 맞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너무 풍파를 많이 겪어 그런가 이제 세상이 그렇게 거대하게 느껴질 일이 없나 봐. 또 먹어본 게 많아서인지 뭘 먹어도 아는 맛이라 새롭지 않은 것도 신기했다. 그리고 홍이가 언젠가 허리를 수술해서 많이 못 걷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는 너랑 노년에 많이 여행 가려고 했는데 이러면 곤란하다.
참 우리 동네 소바집에 데려가 텐동을 먹였다. 밥 위에 튀김을 얹어서 달달한 소스를 뿌린 요리라니. 홍이는 엄청 느끼할 거라 상상했을 텐데 한 입 먹고 밥과 튀김을 같이 먹는 것은 극락…. 의외로 너무 맛있다며 이틀 연속으로 텐동을 사 먹었다. ㅎㅎㅎㅎㅎ 귀여웤
교토로 가는 홍이를 도쿄역에서 배웅할 때 나는 절대 참을 거라고 전날부터 다짐했는데 저것이 먼저 눈에 물이 순식간에 차 올라 벌건 코로 나를 본다. 그 얼굴을 보고 어떻게 참으라고. 문 닫힌 기차 사이에 두고 뚝뚝 울어버렸다. 둘이 공항이 아니라 기차가 뭔가 차암 슬프네 이러면서 장소 탓을 했다.
나는 차도 없어서 걷기는 오지게 많이 걷고 우리 집은 재워줄 수가 없어서 호텔비에 뭐에 돈도 무지 많이 쓰고 도쿄는 음식이 맛대가리도 없는데 고생만 시키고 보내는 거 같다. 항상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홍이가 가고 도쿄를 걷다 이 멋진 걸 못 보여줬네. 맛있는 걸 먹으면 여기를 데려왔어야 됐네. 그제야 이것저것 아쉽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한국 갔다 오면 홍이가 맨날 하는 말이다. 언니랑 그 식당을 갈걸. 저 카페를 갈걸.

이게 사랑이 아니고 뭐겠어.
건강해라 진짜 언니 곤란하다.

내가 중간에 가로챈 파자마 ㅋㅋ
'대화 하는 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람들은 나만큼 부끄러운 기억이 많을까? (2) | 2026.05.13 |
|---|---|
| 나는 환타지 소설을 못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8) | 2026.04.13 |
| 어디에나 있는 작은 지구 (6) | 2026.04.01 |
| 마흔 넘어 영어 : 캐리비안의 그녀 (12) | 2026.01.29 |
| 미인을 부르는 야마가타 (12) | 2026.01.1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