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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산타의 존재를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는 아이였다. 부모가 새벽 6시에 나가서 밤 11시쯤 귀가하는 맞벌이 집의 모든 가정보육은 ‘테레비’가 도맡아 하게 되어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방송에서 아무렇지 않게 산타에 대해 여과 없이 말했다. 밤 8시가 넘어가는 방송에선 당연했다. 드라마에서 부부가 이번엔 애들 산타 선물 뭘로 준비하지? 이런 대사를 한다거나 저는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 산타를 믿었거든요. 하는 예능 인터뷰 같은 장면을 유치원생 때부터 봤었다. 혼자 대충 생각해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실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도 안 생겼다. 전 세계에 딱 하루 동안 그것도 심야에 선물을 나눠주는 할아버지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하루가 초4까지 산타를 믿고 있을 거라는 데 계속 의심의 불씨가 있었다. 나보다 영특한 아이인데..? 가끔 유튜브도 보고 하는데…? 농경사회에 태어났으면 일찌감치 한 사람 몫은 해냈을 텐데..? 설마 진짜로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의 의심은 작년부터 나날이 커져갔다. 어느 순간 쟤는 알면서 선물이 탐나니까 믿고 있는 척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엄마 요즘엔 굴뚝이 없는데 어떻게 산타가 들어오지?
이런 질문을 들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할지 떠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글쎄… 굴뚝으로 들어오는 것도 사실 신기한데 이런 집도 들어오시겠지.
에헴 어떠냐 이렇게도 빠져나가서 놀랐지롱. 속으로 생각했다. 짜고 치는 고스톱에 다 아는 사람들끼리 밑장 빼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밤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다. 앞에 가던 하루가 소리쳤다.
-엄마!! 이번에는 산타 할아버지한테 무슨 선물을 달라고 하지???
뒤에 가던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엄마 이번에는 나 뭐 사줄 거야~??
라고 밖에 들리지 않아서 이게 다 뭔 짓인가 현타가 왔다.
-하루야, 너 다 알고 말하는 거지?
나에게 이 타이밍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웠다. 이제 이런 낯 뜨거운 연극을 서로 그만할 때가 되었다 판단한 순간이었다. 이제 됐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순간, 하루가 급 브레이크로 자전거를 세우며 돌아봤다.
-무슨 말이야? 뭘 다 알아?
나는 하루 얼굴을 세심히 살폈다. 순수한 검은 눈동자가 날 조금도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아냐, 아냐. 엄마가 딴 소리 한 거야.
-무슨 말이야? 엄마 솔직히 말해. 내가 뭘 알고 뭘 모른다는 거야?
협… 좁쌀밥됐다…
내 운명이 두 갈래의 길로 갈리며 딱 두 개의 선택지를 내놓았다. 폭로할 것인가. 지금은 덮을 것인가. 후자가 훨씬 쉬었다. 시치미를 뚝 떼면 그만이다. 시간이 내 대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난 이 연극에 사실 알게 모르게 진절머리가 나고 있었다. 꿈과 희망을 안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 같은 엄마도 있다. (여기 외칩니다!! 이런 여자도!!! 있습니다!!!)
물론 처음엔 귀여웠다. 동화같이 아름다웠다. 모두가 믿고 있는 유치원 아이들 대열 속에 내 아이도 당연히 끼워야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넘어가는 언저리부터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질문이 시작되면서 피로가 쌓였다. 선물은 날로 구하기 어려운 종목이 되고 거짓말은 거짓말을 부르고 선물 상자와 포장지를 숨기고 몰래 선물을 사다 장치하는 것은 교묘해져야 했고 그러고 있는 동안의 인생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물질적 부족함이 없는 애한테 또 ’ 물건‘으로 제공해야 하는 것도 참 스트레스였다. 이번 해에는 11월이 다 되어가도록 본인도 갖고 싶은 걸 못 정해서 아.. 어떡하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선물을 엄빠가 대신 생각해야 하는 건 정말 쓸데없는 업무인데, 마감기간이 12월 25일까지라고 정해져 있는 게 정말 싫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미루거나 돈으로 받아두어도 좋을 일을 꼭 물건 형태로 그날까지 마련해야 하는 비효율. 대충 장난감 하나 준비하기엔 그게 다 집의 쓰레기가 되고 아이는 아이대로 그다지 기쁘지 않은데 결국 돈을 지출하게 되는 것도 비효율. 이 쌩돈 들어가는 연극에 나는 어떤 낭만도 느껴지지 않았다.
첫마디는 얘가 다 알고 있을 거라는 내 착각에서 비롯된 실언이었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산타는 엄마 아빠잖아. 하루 알고 있었지?
-ㅇ..ㅇ?????
정말 하루의 얼굴은 이랬다.
울면 어쩌지. 내 생각보다 더 상처받은 거면 어쩌지. 난 천벌을 받을 거야. 갑자기 두려움이 덮쳤지만 에라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못 먹어도 고다!!
하루는 울거나 화내지 않고 침착하게 좀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
매년 하루가 받은 선물은 엄마 아빠가 인터넷에서 주문한 선물이고 3년 전에 온 자전거가 밤이 아닌 낮에 택배로 도착한 것도 그 이유고 (여기부터 이상하지 않았니..?) 모든 집 아이들이 받는 선물은 그 집 부모님이 준비하는 것이란 걸 설명했다.
-그럼 왜 구글 지도에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산타가 어디 날고 있는지 나와?
-구글이 제공하는 서비스 중 하나야. 세상 어린이들을 속이기 위한 장치야.
-그럼 왜 … 산타 그.. 사진 있잖아.
-그것도 애들을 속이려고 산타가 집에 온 것처럼 합성해 주는 어플이야. 하루는 그럼 핀란드 출신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고 일본의 마츠모토 성 조립을 작년에 줬다고 생각했어?
-그냥… 어른들만의 메신저 같은 게 있어서 서로 뭔가 알려주는 그런 게 있는 줄 알았어.
-선물을 못 받은 반 친구들은 왜 못 받았다고 생각했어?
-착한 아이가 아니어서…? 못 받은 애들도 있어..?
집에 와서도 계속 그때 그건 어떻게 한 거냐 모든 산타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물었다. 배신감보다 감쪽같이 속인 부모의 수완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 정말 적성에 안 맞았다.
하지만 T도 사람이다.. 내 이기심 때문에 애가 더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이 줄곧 있었다. 꿈과 환상들이 계속 날 째려보고 있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평생 이 죄책감이란 족쇄를 차는 형벌을 받아야겠지? ㅠ..ㅠ
그런데 인터넷에서 내 변호단이 나타나 나를 구원하기 시작한다. 최종 변론 한 방에 판결은 정말 순식간에 뒤집혔다.
하루와 자기 전에 같이 누워서 다른 사람들은 언제 산타의 존재를 알았는지 같이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다. 연관 검색어에
산타 선물을 몇 살까지 준비하면 좋을까요
산타를 몇 살까지 믿었나요
아이가 산타가 진짜 있는지 물으면?
아이들 산타 선물용으로 나이별 평균 지출 금액은?
줄줄이 나오는 걸 보고 하루는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다. 마치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 밖을 처음 깨닫고 반대쪽 세상 벽에 손을 올리며 전율하는 모습 같았다. (관찰 예능보다 200프로 재밌..ㅠㅠ 미안해 엄마가 이런 순간에..)
그리고 어느 앙케트결과에 도달했다.
언제 산타의 존재를 알았는지 가장 박빙의 나이가 딱 초4에 해당하는 10살이었다.
믿고 있다. 47%
안 믿는다,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안 믿었다 등등 53%
이 결과를 보자마자 하루가 날 보며 이렇게 말했다.
- 엄마.. 알려줘서 고마워…
너무 놀라운 말을 들어서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거 보고 그런 거야?
-응. 반 애들 53명은 알고 47명이 모른다면 난 53명 중의 하나가 되고 싶어. 내가 모른 채로 있으면 아는 애들이 속으로 날 아직 애구나~ 무시했을 거 같아. 어우… 큰일 날 뻔했네. 아 다행이다.
-그… 그래도 아직 산타를 믿는 애들한테 사실을 말하면 안 돼.
-그렇지 당연하지. 말 안 하지. 그냥 뭐 얜 아직 모르는구나. 음.. 이렇게 생각하겠지. (얼굴이 기득권자가 되어있음ㅋ)
기쁘다 구주 오셨네 다 찬양하여라~
머릿속에 성탄절 종이 댕댕 울리며 찬송이 터졌다. 나 자식은 역시 완벽한 타이밍이 터뜨린 것이었다. 나 자식!!! 이상한 의심만 심어주었어도 금방 들통이 났겠지만 이렇게 스트레이트로 말해주는 메리트도 있었던 것이다.
-엄만 하루 선물 숨기고 그러는 게 재밌었겠다.
-솔직히 말해도 돼?
-응
-그게 그렇게 재밌진 않았어. 엄마는 하루한테 거짓말하면 얼굴 표정 관리가 안되거든. 근데 산타의 수법이나 산타의 의도를 막 둘러 될 때 그 거짓말을 짜는 것도 싫었고 즐겁지 않았오… (그런 시간이 너무 인생 아까웠어…) 하루한테 거짓말하고 싶지 않거든.
-그렇구나 거짓말이긴 거짓말이니까.
-이제 하루는 자유로워! 엄마랑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가고 싶은 데 모든 것이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수 있는 거야.
-호오… 그렇구나!!
하루는 다음 날 힘차게 일어나더니 선물 3개를 정해왔다.
오사카 USJ 해리포터 에리어
오사카 내년 박람회!
오사카 성에 데려가 줘!!
와우 새게나 패키지로 야무지게 골라오셨네요.
네네.. 고객님, 참신한 아이디어 잘 접수되셨습니다.
오늘도 T어미 밑에서 무사히 성장하신 점 축하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같이 우리 집에서 퇴장하는 산타 할아버지 합성 어플을 해 봤다.
너무 감쪽같아서 눈이 휘둥그레진 하루.
엄:이런 사진을 찍어서 다음날 아이들한테 보여주면 믿겠어? 안 믿겠어?
하: 절대 믿지.
엄: 세상에 이런 장치가 이렇게 많은데 하루는 아기 낳면 하루 애기한텐 산타 할아버지 있다고 안 할 거야?
하: 할 거야 ㅎㅎ 애가 믿었으면 좋겠어.
엄: 맞아, 엄마, 아빠도 처음에 진짜 믿는 게 너무 귀여웠어.
하: 근데 왜 지금 말했어?
엄: 엉? (도돌이표?) 엄만 하루가 벌써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줄 알았어. 그래서 그렇게 물어본 거야.
하: 하루 진! 짜! 백 퍼센트 맹세! 몰랐어.
엄: 아 그래?? 조금도 의심도 안 했다?
하: 어! 정말!
엄: 그럼 엄마 원망하겠네.
하: 아냐 너무 기뻐. 알아서 다행이야.
고마워 우리 아들. 엄마 엄청 졸았는데 큰 산을 하나 넘어서 너무 좋아.
진짜 마지막으로
이런 표도 발견했다. (전국 20대에서 60대 대상 )
산타상을 몇 살까지 믿었나요.
회색 부분 저기… 5.2% -지금도 믿음 (롸아???????)
저분들 엠비티아이 데이터 ㅅ빨리 좀 시급함. 궁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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