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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출근 했더니 미얀마 출신의 묘상과 나, 단 둘이었다. 오픈 준비에 여념이 없는 내게 묘상이 애호박을 가지고 왔다.
묘: 이거 완전 상했는데 버릴까요?
누가 봐도 변질된 상태였다. 당연히 사람에게 먹일 수 없으니까 폐기 처분이겠지만 뭔가 일본에서 좀 살아 본 고인물로 촉이 발동했다.
동: 일단, 타무라상 오면 보여주고 버릴까요?
묘: 이거 완전히… 아. 네.
그 뒤의 프로세스는 모르겠지만 맘대로 버리면 안 될 거 같았다.
타무라상이 출근했고 애호박이는 어떻게 될까 묘와 나의 이목이 집중됐다. 뭐 셋이나 증인이 있으니 충분히 그의 운명을 결정지어도 될 것 같았는데 …
타무라상이 애호박을 해부해 (반으로 갈라) 내부 사진을 접사하고 그룹 챗에 있는 상부에 (에리어 매니저)에 보고를 하더라.
아무리 내가 일본 사람 이런 줄은 알았지만 저럴 줄은 몰랐네. 답변을 기다리는 타무라상을 보며 묘상과 내가 몰래 눈을 마주치고 흠칫 놀란 제스처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가게 돈으로 새 애호박이를 구입해도 된다는 승인이 떨어져서 타무라상은 슈퍼에 갔다.
애호박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안 한 나 잘했다.
아마 묘상도 왠지 쓰레기통에 던지기 전에 나한테 한 번 물어보길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30년 전쯤 그렇게 잘 나가던 일본은 도대체 왜 이렇게 꽉 막히고 느린 아날로그에 목숨을 걸게 된 것일까. 버블이 붕괴되고 믿을 건 근면 성실한 태도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낸 건 아닐까. 꼼꼼한 매뉴얼을 만들어도 실현 불가능하면 수정을 해 나갈 텐데 결국 그 미친 일을 일본인들이 해내버리는 게 문제가 아닐까. 이런 여러 가지 가설들을 메구상이랑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메구상이 친구 회사 이야기를 해 줬다.

그 친구는 아버지 회사에서 근무 중인데 매달 서른 여명의 직원 월급을 현금으로 지급한다고 한다.
(경악…) 아르바이트가 아니다. 대부분이 정사원이다. 월급날이 되면 메구상의 친구, 엄마, 언니 온 집안사람들이 출동해서 몇 백만엔을 인출해 은행에서 나른다. 친구는 그날이 가까워오면 극도의 스트레스로 심장이 저릴 정도라고. 은행원도 오래 전부터 아버님께 제발 부탁이니 이체를 이용해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데도 자기 죽으면 마음대로 하라며, 살아생전엔 택도 없다 못을 박았다. (와러펔ㅋㅋㅋㅋ)
사람 손으로 세다보면 가끔 금액을 잘못 넣기도 하는데 군말없이 다시 달란대로 지급을 해야했다. 사실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다. 한 번은 직원 한 명이 아침에 받은 월급을 봉투째 잃어버렸다며 회사 안에서 분실했다고 우겨 전액을 다시 지급한 적도 있다고 한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직원들도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다. 공과금이며 카드 값이 나가려면 통장에 돈이 있어야 하니까 월급 받자마자 점심시간엔 은행으로 달려간다.

아버님의 은행 불신은 왜 생겨난 걸까. 신용카드, 전자머니, 인터넷 뱅킹, 이 모든 게 시도될 때마다 일본은 유독 불신하고 무서워한다. 한국사람도 사실 어느 정도 리스크를 두려워하는 건 있지만 편리함에 무릎 꿇는달까. 효율성이 이겨버리지 않나. 가만 보면, 일본인들은 아무리 지름길이고 빨라진대도 거기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보다 안전한 걸 우선가치로 두는 사람이 많다는 느낌이 든다. 거기에다가 과정이 아무리 복잡해도 별로 고생스럽지 않는다는 점. 가끔 보면 사디스트 같애… 뭔가 빡세고 복잡할수록 되게 좋아하는 거 같기도…
애호박 사진 찍으며 보고하는 타무라상 좀 신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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