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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계모임 친구들이 동네에 수재가 있다며 돈 모아서 같이 받아보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이혼하고 혼자서 딸 둘을 키워내는 것도 팍팍했을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 공부시키자는 말에 고민 했을 엄마를 생각하니 너무 안쓰럽다. 당연히 그땐 알 길이 없었지만 말이다. 친한 내 친구들 둘은 하는데 나만 돈 없어 못한다고 하면 내가 주눅들까봐 시켜줬을 그 시절 엄마의 갈등을 이제와, 이제는, 눈에 보이는 듯 훤하다. 어쩜 그렇게 나는 아무생각이 없었을까 애들이랑 같은 방에서 과자먹으며 학교 끝나고 또 본다고 생각하니 그저 좋았다.

외국어 고등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진학한 동네 수재 언니는 어린 내가 봐도 공부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펴더니 컨버세이션 파트는 그냥 다 외워. 다음에 시험볼게. 시조 외우듯 다 외우게 시켰다. 빠가사리던 나까지 영어 시험 성적이 수직상승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수학성적은 언니도 어쩌지 못했다. 평생에 걸쳐 집합을 이해 못한 나는 공식 근처도 못갔다. 가끔 산수도 간당간당하다.
아직 일본문화 수입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시절. 언니의 일본어학과 친구들은 얼굴도 모르는 일본사람들과 국제 펜팔을 하며 살아있는 일본어 실력을 키웠다. 지금이야 일드보며, 애니보며, 유투브, 만화, 원문소설로 독학도 가능하지만 당시 일본어교육은 책도, 영화도, 음악도 없는 상태로 교과서만 보고 배워야 했다는 것이다.
언니가 펜팔했던 일본인이 텔레비전에 방영하는 만화영화를 까만 비디오 테잎에 녹화해서 편지와 함께 국제우편으로 보내주면 공부가 끝난 우리를 앉혀놓고 틀어주었다. 물론 자막도 없고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몰랐지만 슬램덩크 주인공은 개 잘생겼고 ‘헤이세이 타누키 갓센’(폼포코 너구리 대작전)과 ‘쿠레나이노부타’ (붉은 돼지) 지브리 애니매이션이 충격적으로 하이퀄리티였던 기억이 똑똑히 난다. 바람에 털들 나부끼는 것, 동작 하나하나 부드럽고 빨라서 진짜 놀라웠다.

시험 끝나고 언니랑 과외 그룹 애들이랑 롯데월드에 놀러갔는데 놀이기구를 타려고 줄 서 있을 때 수학여행 온 일본 남자애들이 두껍고 무거운 이선희 안경을 쓴 언니한테 ‘얘넨 콘텍트렌즈가 없나봐. 완전 구리네.’ 이런 말을 했다. 10대가 사람까고 다니는 건 어디나 비슷한 일이지만 설마 그걸 알아듣는 한국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겠지. 언니는 울컥해서 안경을 들어올려 눈물을 닦았다.
“언니... 왜그래? 왜 울어..? “
우리가 걱정하며 묻자.
“쟤네가... 욕했어..” 대답했는데 우리 셋은
‘와.... 언니 외국말로 욕한 거 알아들었어.... 진짜 짱이다...’ 존경과 감탄의 감상만 남았더랬다.
대학 신입생활이 끝나고 2학기에 접어들었을때였나 언니는 렌즈로 바뀌었고 쌍커풀을 만들어 왔다. 아직 붓기가 덜 빠지고 적갈색 마른 피같아 보이는 라인이 생생한 언니랑 공부하고 있는데 언니 연습장에 피가 툭툭 떨어져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우리가 폭탄 맞은 듯 으아!!!!!! 뒤로 발랑 흩어졌다.
언니는“야 니네 빨리 와. 괜찮아. 괜찮아.” 아무렇지 않게 휴지로 피를 꾹꾹 눌러 닦았다.

그 후로 몇달 계속되던 과외는 언니가 바빠졌던가 여러가지 핑계가 생겨 모두 그만두었다. 엄마가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우리 애는 과외 안 해도 성적 괜찮아’ 소리로 쿨하게 거절할 수 있게 혼자 공부 열심히 하고 싶다.... 진심 지금 알았던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물론 수학성적은 버려야겠지만 괜히 돈 안들게 엄마 고민안시키게 잘할걸. 눈치도 센스도 머리도 없었던 내가 너무 빙구같다. 나보다 2살 많았던 친언니가 맨날 나만보면 ‘똑바로 좀 해’ ‘작작 좀 해’ 하면서 답답해 하면 하아... 저 미친... 왜 나만 보면 그래 했는데.. 친언니는 학원 한번 안다니고 전교 2등 성적에 수업끝나면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용돈도 벌었다. 그리고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해서 진학했지... 내가 답답해 보일만 했어... 울언니는 도데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철이 들었을까.

몇 년후 내가 고등학생이 되서 동네 커피숍에서 남자친구와 알콩달콩 있는 과외언니를 봤다. 예쁘게 자리잡은 쌍커풀에 유행하는 옷을 입고 남자친구랑 데이트하는 이화여대생 언니는 분명 지금도 잘 살고 있을 것같다. 내가 일본어하며 일본살고 있단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깜짝 놀라겠지?

지금 내 모습을 과외언니는 몰라도 상관없지만
그때 그 과외 해줘서 그 덕분에 엄마 나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말해 줄 엄마가 없는건 많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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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히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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