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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화제의 광고가 제작되었다. 아주 극히 일부사람들에게 화제되었지만 (왜냐면 방송에서도 뉴스에서도 대대적으로 다뤄주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재일한국인, 흑인과의 혼혈, 그리고 일본인으로 보이는 여학생. (마지막 여학생 이야기는 봐도 봐도 모르겠는데 일본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모습인가?) 스포츠를 통해 차별을 이겨내고 ‘나’를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특히 재일한국인에 대한 달갑지 않은 시선을 다룬것이 금기시하던 이야기를 폭로한 것처럼 굉장한 돌풍을 야기했다. 심지어 “일본인은 차별을 안하는 국민이야.” 라는 미친멘트가 나올만큼 쇼킹했다. 차별을 안하는 사람이 어딨어. 어느 나라나 있는게 차별이다. 우리나라는 내가 어릴때, “사장님 나빠요.” 라는 유행어로 사장님한테 맨날 구박받는 외국인 노동자를 개그로 삼는 무대도 있었구만.
차별을 안하는 사람이란 건 그냥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예 동영상 밑에는 대놓고 한국을 까대는 경연이 벌어져 얼마나 사람들이 한국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게 되는 당황스러운 계기도 되었다. (덧: 일본에 관련된 한국 네이버 뉴스 댓글을 읽으면 똑같이 가슴아파지고 이렇게까지 일본을 싫어하는구나 마찬가지로 매번 새로이 놀랍다.... )

나이키 일본 광고 유투브 페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누군가가 꼭 안아준 것처럼 눈물이 나는 영상이었고 몇몇 댓글은 “이렇게 싸우지 맙시다.. 일본인으로서 창피합니다” 라며 진심으로 평화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영상을 접하자마자, 리카와 수경이. 나의 재일교포 친구들에게 전파했다. 그녀들은 2020년인데도 일본에서 이런 광고가 존재하는 현실에 믿을수 없다며 감격해했다. 60대의 신상과 똑같은 반응이라니. 반세기동안 일본은 변한게 없었구나.

리카는 “언니, 그 재일교포 여자애가 마지막에 야마모토라는 성 위에 당당히 김이라고 이름 쓰잖아요. 그거 보고 엄청 울었어요.” 라고 말했다.
한국이름으로 사는게 얼마나 고달픈일인지 평생을 통해 느낀 리카는 아들과 딸의 성을 일본 이름으로 등록해 학교에 보내고 있다. 한국이름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에는 얼마나 많은 시선을 이겨내야 하는지 아니까 KIM 유니폼은 감동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정말 감동한 것은 그 뒤로 재일한국인과 일본의 차별의식에 대한 기사와 칼럼이 잇따랐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시선으로 냉정하고 침착하게 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가장 반갑고 기뻤다.

 수경이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둘째 수유를 끝내고 펼쳐든 신문에 나이키 기사가 나왔다며 흥분해서 사진을 보내줬다.

기사 내용을 소개하자면
한 교수는 나이키는 이 광고를 통해 “ 일본에 차별은 없다”는 사람들을 위해 물건을 만드는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분석을 했고

BBC는 민감한 주제를 공론화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에서 격한 논쟁을 일으켰다. 한 영국신문은 인터넷 우익들을 화나게 할 뿐아니라 보다 신중한 논객들로 부터 일본사회를 일그러진 모습으로 전한거 아니냐라고 실렸으며

어느 조선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한 곳에 모아 큰 화면으로 선생님과 다 같이 시청했다. 학생들은 ‘멋있다’라는 반응이었다. (애들 어떤 기분이었음? 갬동...)

어느 방송작가는 아버지가 재일 한국인인데 ‘차별 안했다’ 고 아예 없었던 일 처럼 지나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애초부터 차별이 있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이번 광고는 한 발 내딛는 느낌이라고.

이렇게 기자는 (직접 자기가 절대 하지 않음) 많은 사람들의 입을 빌려, 약간 과한 설정이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말하기는 껄끄러웠던 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한편으론 멋지다.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첫 걸음 아니겠는가. 라는 글을 썼다.
(자국민을 디스하거나 한국을 옹호하면 그날로 거의 끝장나는 분위기.. 매스컴에 자유가 없는 건 한국보다 훨씬 심하다) 이해합니다.. 진짜 애썼다... 좋은 기사였다.

앞서 말한것처럼 (요즘 사피엔스 만화편을 읽고 있는데) 차별과 험담이 인류의 종특인만큼 인간이기에 없는 것이 이상할만큼 차별은 만연하다.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죠?!)

흑인이라는 이유는 버스에서 일어서라던 시절부터 2020년이 되도록 살벌하게 죽임을 당한다. 피부색도 같은 한국인이 일본에서 무시당하는 것처럼 한국에서도 일본인 피가 섞이면 한번쯤은 니네 엄마 쪽빠리라며? 라는 소리를 들어봤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중국인과 베트남 노동자에게 친절했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차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언젠든지 우리는 차별하는 입장에서 차별받는 입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앞으로 우리에게 뇌졸증과 마비, 화재, 사고, 이민,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아무도 모르니까. 돌아가면서 이러는건 모두가 손해보는 장사다.. 그런 의미로 결론은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고 억누르는 훈련과 그에따른 진심을 키워야하지 않을까...

재일한국인으로 시작한 이야기지만 존재하는 모든 차별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아래 기사를 소중한 것임에도 자꾸 잊는 나를 위해서 꼭 번역해서 간직하려고 한다.

저널리스트 ‘야스다 나츠키’상의 기사

「日本」という大きな主語と自分自身を一体化させてしまい、「日本政府」や「日本人」を批判されると、「自分」を批判されたかのように感じがちな状態を、心理学の世界では「集団的ナルシシズム」呼ぶのだそうだ。
それが有害な形で表れてしまうことを、荻上チキ氏がヘイトスピーチの解説の中で指摘している。

일본이라는 큰 주어와 자기자신을 일체화시켜 일본정부나 일본인이 비판당하면 자신이 비판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상태를 심리학의 세계에서는 ‘집단적 나르시즘’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유해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오기우에 치키씨가 헤이트 스피치 해설중에 지적했다.

そして、「朝鮮人だっていじめる側の人間はいる」「白人を差別する黒人だっている」という言葉の裏に見え隠れするのは、「モデルマイノリティー神話」ではないかと私は思う。

그리고 “조선인들 중에서도 누굴 괴롭히는 인간은 있다.” “백인 차별을 하는 흑인도 있어” 라는 말 뒤에는 ‘모델 마이너리티 신화’가 아닐까 싶다.

差別される側、マイノリティーに、過度な「品行方正さ」を求め、「清く、正しく、美しいマイノリティー像」を押しつけてしまうような風潮だ。
例えば、子ども向けの「人権啓発ビデオ」で、ざっくり言うと「相手のことを知らないうちはいじめていたけれど、話してみて相手のことを知ったら”いい人”だったからいじめてはいけないと感じた」という筋書きのものを目にしたことがある。

차별당하는 쪽, 마이너리티에 과도하게 방정한 품행을 요구해 결점없고, 옳고, 아름다운 마이너리티 상을 강요하게 되는 풍조다.
예를들면 아이들이 보는 인권계발 동영상에서 ‘상대방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괴롭혔지만 이야기를 통해 상대방을 알고보니 ‘좋은 사람’이었더라 그러니까 괴롭히면 안된다. ‘이런 줄거리를 본 적이 있다.

相手のことを「知らない」ために、偏見が生まれてしまうことは確かにあるだろう。一方、「いじめをしてはならない」のは、相手が「いい人」だから、という理由なのだろうか?

상대방을 모르니까 편견이 생기는 일은 있다. 하지만 괴롭히면 안되는 것이 상대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일까?

「いい人」という線引きは、そもそも恣意的であいまいなものだ。仮に目の前の人を「いい人」ではないととらえたとき、その人が殴られようが暴言を浴びさせられようが、観て見ぬふりをしていいということだろうか。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은 애당초 자의적이고 애매하다. 만약 눈 앞의 사람을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그 사람이 맞거나 폭언을 듣고 있어도 본체만체해도 되는 것일까.

それこそ「いじめの原因はいじめられる側にもある」と、不当な行為自体を省みず責任転換をする構造に似ている。
ある、尊敬する先輩が、「人権を守るとは何か」ということを語ってくれたことがある。

이것이야말로 이지메의 원인은 당하는 사람에게 있다라는 부당행위 자체를 반성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는 구조랑 다르지않다.
어느 존경하는 선배가 “인권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해 준 이야기가 있다.

「自分にとって苦手な人、意見が合わない人、どちらかというと嫌いな人がいたとする。無理に仲良くする必要なんてない。でも、その人がものすごく不当な扱いを受けていたとき、”その扱いは違う”、と声をあげられるかどうかだ」、と。

자기에게 어려운 사람, 의견이 다른 사람, 구태여 말하자면 싫은 사람이 있다고 치자. 무리해서 친해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심히 부당한 취급을 당하고 있을 때 “그렇게 대하면 안돼.” 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아닌지- 라고.

先日も香港の民主活動家3人が有罪認定を受け、拘置所に移送されたことについて、「親日家の彼女たちを助けよう」という声もあがった。けれども求められているのは「親日家だから助けよう」ではないはずだ。誰であっても、不当に自由を奪われることがあってはならないだろう。
ナイキのCMには、こんな言葉が出てくる。
「いつか誰もが ありのままに生きられる 世界になるって?」
「そんなの待ってられないよ」
そう、ただ待つのではなく、それは私たちが築き上げていくもののはずだ。

얼마전에도 홍콩 민주활동가 세 명이 유죄인정을 받아 구치소에 이송되었을 때, ‘친일인 그녀를 돕자’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친일이니까 돕자’가 아니다. 누가 되었든 부당하게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이키 광고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언젠가 누구나 자기 자신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대.”
“그걸 어떻게 기다려”
그렇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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