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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작 한국어를 가르쳐드리고 있지만 내게 인생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신상. 그분에게 파친코 책을 소개받고 재일한국인의 격렬했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어 너무나 뜻깊은 요즘, 이어서 처음으로 신상 가족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파친코의 재일한국인의 사건들은 모두 진실이지만 등장인물들은 허구였다. 그러나 신상의 가족들은 소설보다 소설같은 실체였고 그런 신상 가족의 이야기를 여러분들께도 들려주고 싶다.

맨 처음, 일본에 건너온 건 할아버지였다. 아마 일본 식민지시절 말도 안되는 세금으로 조선인의 재산을 다 앗아갔을 때 할아버지도 농경지를 잃으셨다. 할아버지는 체격이 크고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묵묵히 육체노동을 하셨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할머니가 일본으로 건너오셨다.

일본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쓰레기 같은 철조각, 쇠조각을 모아 파는 일이었는데 성실히 티끌을 모아 나중엔 두어개의 공장을 일으켜 철강업으로 돈을 모을 수 있게 되셨다.
할머니는 다정하고 귀엽고 순진하고 얌전하셨다. 할머니는 파친코 소설의 장면처럼 아기를 들처업고 설탕과자, 달고나 같은 걸 만들어 기차역에서 파는 일을 하셨다. 신상은 할머니에게서 그 시절이 어렵고 고되었다는 이야기를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늘 도와주고 친절했던 일본인의 이야기만 하셨다. 항상 “해 준 일은 잊어도 받은 일은 잊지말라”고 가르치셨다.

두 분 사이에는 큰이모, 작은이모, 외삼촌 그리고 엄마 4명의 자녀가 있었다. 큰이모는 의사인 재일 한국인과 결혼했고 작은이모는 집을 짓는 재일 한국인과 결혼했다. 외삼촌은 국립대학까지 진학하는 수재였는데 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고 일본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다고한다. 그리고 막내 엄마는 아빠와 만났다.

아버지는 유학생이었다. 박정희 독재정치가 한창이던
한국의 대학생이었다.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진했던 학생운동가였다. 반란을 일으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던 시대. 그 시대에 절망하여 도쿄로 왔고 우연히 할아버지의 철강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엄마와 결혼을 했다.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큰언니, 작은언니, 그리고 신상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에 뜨거운 애착이 많았다. 몸은 도쿄에 있지만 일본의 남한 단체, 민단의 활동을 하며 한국 정치문제에 탄식했다. 조총련 (북한단체)와의 결속도 계속 다지려고 노력하셨다.
1972년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과 북한의 비밀회담이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일이 있었다.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통일을 향해 나아가자는 첫 발이었다. 도쿄에서도 누군가 성명을 발표했는데 같은 날 7월 4일 민단과 조총련 통합 회의에서 그것을 발표한 것이 바로 신상의 아버지였다.

한국의 통일과 부흥을 누구보다도 바라던 아버지의 자식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큰언니는 기름공장에 다니는 재일한국인과 결혼을 했다. 작은언니는 파친코 사업을 하는 재일한국인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지병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조용히 신상을 불렀다. 네가 일본인과 결혼해도 우리는 상관없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엄마가 돌아가시자 혼기가 찬 재일한국인 남자를 소개해 줄 중매인과 닿을 길이 없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과 함께 단단했던 재일한국인의 사회도 조금씩 네트워크를 잃어갔다. 신상은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다.

3대에 걸쳐 처음으로 일본인 가족이 생겼다.
-신상 남편은 신상이 한국사람인 걸 알았죠?
-네 결혼 전부터 알았죠
-어떻게 생각했대요? 거부감은 없었대요?
-남편은....
또박또박 힘있는 한국어로 신상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 생각이 없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좋은 남편이네요.
-네 그렇죠. ㅎㅎㅎ
-어떤 나라사람이든 아무생각 없는 남편이 최고죠.
- 맞아요 ㅋㅋㅋㅋ

아무 생각이 없는 신상 남편과는 달리 시어머니는 조금 껄끄러워했지만 결혼은 시어머니와 하는게 아니니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신상과 남편은 아들과 딸을 낳아 딸은 다시 아들을 낳았다.

-아버지는 한국으로 항상 다시 돌아가고 싶었겠어요.
-맞아요.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어떻게 가겠어요. 엄마는 일본에서 거의 자라와서 한국에 데려갔다면 너무 가여웠을거에요. 장인 장모님을 두고 갈 수도 ... 더 시간이 지나서는 아이들까지 데리고 당장 먹고 살게 없는 곳으로 이주할 수 없었죠.
-모두 다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 마다하지 않은 흔적이 느껴져요.
-네, 철조각 줍기, 기름공장, 목수, 파친코... 재일한국인은 더럽거나 위험하거나 음지의 직업 밖에 선택할 수 없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오직 의사. 그 직업 뿐이었죠.

아.....그런 우리가 지금은 마케팅, 컨설팅, 서비스업, 회사 대표, 프리랜서까지 가능하게 되었다니. 당연한 일인데도 다행이다....

나중에 꼭 신상과 같이 둘이서 한국여행을 가고싶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아버지가 살았던 곳이나 그분의 흔적이 있던 곳을 가 보고싶다 생각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바람처럼 한국도 북한도 자유롭게 날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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