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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군이랑 단 둘이 여행 갔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최소 11년 전 임신 중에 갔던 온천여행이 마지막이었던 거 같은데. 와… 우리 재밌게 잘 다녀올 수 있을까? ㅋ내가 이런 걱정을 하다니 너무 중년 황혼 부부 같잖아.

하루는 학교에서 2박 3일 수학여행을 갔다. 마지막까지 갈까 말까 고민을 하더니 오니츠카 때문에 가야 할 것 같단다.
-오니츠카가 왜?
-오니츠카는 성격이 좀 조용한 애라서 나 말고 친한 애가 없어. 게다가 우리 방에 진짜 나 빠지만 말할 사람 없을 걸.
키 큰 오니츠카 때문에 가기로 했다니 ㅠㅠ 착한녀석시키.. 오니츠카는 극극 내향인인데 전교에서 제일 키가 크다. 제발 아무도 날 쳐다보지 말라고 늘 기도하는 아이가 이미 선생님 키를 넘어서 어디서나 눈에 띈다. 그래서 고양이처럼 등을 굽히고 다닌다고. 왜 신은 키를 그렇게 배분하셨나요.
하루가 아무도 신경 안 쓰고 나중에 자세 나빠지니까 당당하게 펴라고 했더니 너무 오랫동안 이렇게 해 와서 고칠 수가 없댄다. 그럼 이제 여름이니까 긴팔 긴바지만이라도 그만 입으라고 해서 가끔 반팔을 입고 오게 되었다. (피부를 노출하는 것도 부끄럽다고 함) 짜식들 쪼꼬만 것들이 진짜 친구 노릇 아주 잘하네.
하루가 수학여행을 떠나고 조마조마했던 케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왜냐면 빌린 스포츠카가 2인승이기 때문이다. ㅋㅋㅋㅋㅋㅋ

마츠다 스포츠카
오늘의 렌터카
스포츠카라고 해서 엄청 기대했는데 집 앞에 온 것이 이게 다야?

무슨 소꿉놀이도 아니고 엄청 코딱지만 한 거에 놀랐다. 작은 캐리어를 짐칸에 넣으니 꽉 찬다. 어머어머어머 원래 이런 거야? 이걸 어따 써먹어?

나는 참 귀엽긴 하다만….

너… 괜찮아?
아주 꽉 찼어 ㅋㅋㅋㅋㅋㅋ
스포츠카의 매력을 발견하기도 전에 케군이 낑낑대며 운전석에 몸을 끼는 걸 보고 빵 터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레고에 사람 끼우는 것처럼 비집고 들어오는데 미친 듯이 웃기다.ㅋㅋㅋㅋㅋㅋㅋㅋ 스포츠카 돈 많은 사람들이 타는 거 아니었어? 이렇게 궁색한 모양새가 맞아?

바닥이랑 의자 높이도 낮아 쭈그리고 타는 자세가 된다. 뭔가 궁둥이에 엔진 진동이 느껴져서 근질근질하기도 하고.
에비나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이게 하행길 휴게소 최고 맛집
JB’S 햄버거


버터 식빵이 촉촉쫀쫀 예술이었다. 소고기 100프로 패티도 너무 맛있고… 이거는 휴게소 음식이라고 하기엔 너무 황송하다.


배고플 때 먹으려고 쟁여둔 고구마 케이크.

하필 스포츠카를 빌린 주말엔 태풍이 두 개가 올라와서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 보면서 케군이 몇 번을 절망했던지. 밥 먹고 나오니까 잠깐 날씨가 맑았다. 지금이야!!! 뚜껑을 열어!!!

저기 먹구름 낀 곳 까지가 찬스다.
고속도로를 달렸다.
와… 그러고 보니 나 45년간 스포츠카 타 보는 거 처음이야. 생각해 보니 이 나이 먹도록 안 타 봤네. 뚜껑을 열면 마빡에 강풍이 불어닥칠 줄 알았는데 머리 아래를 보호하면서 공기가 철저하게 위를 향해 불었다. 인체공학적이다… 손을 머리 위로 들면 갑자기 공기의 저항을 받아 어마어마한 소음을 냈다. 바람을 이렇게 계산했다니.


뚜껑을 열어도 머리칼이 매우 평온하다는 사실을 알게 됨.

오야, 내가 간대이.

케군이 요새 유튜브로 스포츠카 리뷰하는 아저씨들 채널을 엄청나게 보고 있다. 진짜 사고 싶다고 한다. 작은 꿈 이래. (작지 않아…) 좋아하는 게 생겨서 다행인데… 이 마츠다…. 왜 스포츠 모드로 달릴 때 언덕 올라가면 브레이크 경고 뜨는 거야. 빨갛게 ‘브레이크 시스템 이상’ 경고가 막 떠서 케군은 어리둥절해하고 나는 헐레벌떡 검색하고 여긴 고속도로고 난리도 아니었다.
마츠다 스포츠카의 고질병이고 원래 저렇대. 다들 무시하고 달린대. 브레이크 액이 찰랑거려서 그렇다나? (차무식…) 이틀 동안 무탈했지만 경고음은 너무 별로였다.


호텔 도착.






방에 있던 그림책. 하루가 있었으면 같이 읽었을 텐데.

목욕하러 가는 길.


목욕하고 저녁밥 기다리는 동안 고구마 케이크를 먹고 있는데 밖에 사이렌이 울렸다. 동네 이장님이 폭우가 오니까 다들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강물이 불어서 강가에 가지 말라고 어르신들은 미리미리 대피하라고…
여행 왔는데 경고음과 사이렌….
우리 괜찮은 거 맞지? 하니까
케군 표정이 이랬다.


매점 구경도 하고
미리 선물도 사놓고
이게 좋네 저게 좋네 훈수 두는 하루가 없어서 조용하고 빠르게 쇼핑을 끝냈다. (하… 솔직히 너무 좋다 )

호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정원

청둥오리 한 쌍이 지나갔다.

하루랑 왔으면 절대 못 지나갔을 오락실.
그냥 조용히 지나 옴. (하…. 좋아.)

이 집 뷔페는 진짜 최고였다.
다국적 요리가 있었고 특히 튀김이 맛있었다.
웨이터가 별 설명 없이 메뉴판을 줬는데 내가 거기서 무제한 알콜 부분을 발견했다.
- 어? 여기 FREE라고 쓰여 있는 메뉴는 혹시 무제한 메뉴인가요?
-네. 2700엔에 이 안의 알콜은 다 무제한이십니다.
그냥 지나칠 뻔했다가 케군과 나는 폭죽을 터뜨리며 바로 시켰다. 보통 두세 잔에 만족하는 다른 고객과 달리 우리 케군은 마치 밑 빠진 독 같은 놈이거든요. 3잔 이상 마시면 뽕을 뽑는 건데 얘는 10잔을 마셨다. 얼마가 굳은 거야. 크하하하하
이게 딱히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순간이 많아졌다. 예전엔 FREE가 하나의 그림처럼 보였었는데 영어와 친해진 지금은 그 뜻이 이야기로 들려온다고나 할까. FREE라는 말이 ‘공짜로 드실 수 있어요.’ 이렇게 말로 다가온다.


의외로 케군이랑 조용히 밥만 퍼묵퍼묵하지 않았다. 난 또 되게 할 말이 많았다. 하나하나 맛 품평하면서 케군의 불균형한 식판을 구박하면서. 그리고 케군도 하루가 없으니까 나한테 어리광도 부리고 딱 십 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다시 연애를 하는 거 같긴 한데… 딴 놈이랑 하는 기분… 그 잘생겼던 남친 어디 갔지.. 나 몰래 내 취향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제일 맛있었던 건 의외로 그린카레였다.
타이 푸드 맛집이었네.
이것만 팔아도 대박 날 것 같은 맛이었다.

한국 음식 코너에는 물냉면이 있었다.
이건 아니야…. 매우 달달한 김치 빨은 물이었다. 어디서부터 오해가 시작된 걸까요.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디저트 코너에도 대박 맛도리가 있었다. 커피맛 슈크림에 발 동동.


토를 하는 한이 있어도 먹어야겠다. 두 개 먹었다.

다시 밥 먹고 온천탕에 들어갔다가 방에 와서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다.

밤 열 시 넘어서였나.
갑자기 아이폰에 지진 경고가 귀청이 떨어지게 울렸다. 살살 흔들리던 침대를 시작으로 우다다다다 서랍들이 요란하게 열리고 방이 좌우고 덜컹덜컹 흔들렸다.
지진이다!!!!
케군 등에 딱 붙어서 집도 아닌데 우째야 할지 몰라서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평소보다 한참 길었다. 뉴스를 보니 우리가 있는 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 진원지였다. 하루가 수학여행 간 곳은 거의 영향이 없었다.
태풍에 지진에 스릴이 넘치네요.
케군이랑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온천물에 머릿결이 뚜룬뚜룬 건강해짐.
아침 일찍 목욕을 하고 조식을 먹었다.



호우지차가 맛있었다.

기념으로 제일 좋았던 풍경을 남겨 봄.

방에 돌아와서 양치하고 말없이 각자 짐을 꾸리는데 20분도 안돼서 칼각으로 패킹을 마쳤다.
-와!!! 여보짱!!! 하루가 없으니까 잔소리 없이 진짜 순조로워!!!
둘이 엄청 웃었다.
꼭 체크아웃하기 전엔 여기저기 널브러진 하루 물건들을 지적하면서 빨리 좀 하라고 따라다니면서 애를 잡도리하는 시간이 없으니까 무거운 철갑옷을 벗어던지고 달리는 것처럼 홀가분했다. (아 ㅋㅋㅋ 나 진짜 엄마가 적성에 안 맞나 봐)


안녕, 오늘도 잘 부탁해. 쪼꼬미

케군은 진짜 신나 했다.
스피드 낼 때마다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비 오는 날 체크아웃하고 어디 갈까 둘이 고민하다가 박물관 체험관 뭐 이런 데는 애랑 하도 많이 가서 이제 너무 별로지? 아울렛에 가자! 의기투합했다. 아울렛도 생각해 보니 딱 11년 만이네.


-여기 아울렛 안에 엄청 유명한 함박 스테이크 집이 있대 일단 오픈하자마자 번호표를 받자.
-엥? 무슨 오픈하자마자 점심 예약을 해.
코웃음 치며 갔는데

이미 대기시간이 4시간이었다.
뭔데 뭐 금이라도 구워주는 거여?

보기엔 그냥 싸구려 패밀리 레스토랑 비주얼 아니야? 그런데도 진짜 200번이 넘는 표를 받았다.
레스토랑 번호표를 받고 나오는 길에 케군이 어떤 여자분을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여자분은 입을 가리며 맞이한다. 뭔데 뭔데? 바람녀 소개라도 시켜주는 건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넓디넓은 아울렛에서 케군이 회사사람을 만났다. 신기하다!
케군이 “제 아내입니다.” 하고 나를 소개했다. 오늘 화장 잘 먹어서 너무 뿌듯하다.
“어제 지진 났는데 괜찮으셨어요?”
“네네. 좀 컸죠. ”
이렇게 자연스러운 스몰토크도 먼저 했다.
처음 보는 사람하고 무난하면서 친근한 이야기도 꺼낼 줄 알고 나 정말 영어 배우길 참 잘했다. 영어에 국한된 것뿐만 아니라 미국적 밝은 에너지? 도 함께 배우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아무래도 우연히 마주친 케군의 회사사람은 생얼이라서 얼굴을 주춤주춤 가리신 거 같다. 엄청나게 많은 주근깨로 뒤덮여있었다. 표범 무늬 같았다. 예쁘다 안 예쁘다를 말하는 게 아니라 피부과 경력이 쌓이다 보니까 카운슬러의 시선으로 자꾸 알맞은 메뉴가 떠오른다. 저거 피코레이저로 확 두어 번 지지면 딱지 떨어지면서 1년 후에 굉장히 개선될 텐데. 신주쿠 병원에서 9800엔이면 한 번 하고 친구 소개로 5000 포인트 받고 2회는 4800엔에… 음… 여기까지 생각하고 또 다짐한다.
다른 사람 얼평하지 말고 내 얼굴 가지고 내 만족만 하는데 집중하자. 그게 나의 새로 생긴 작은 신념이다. 모두가 삶의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것. 내 외모 관리도 다른 사람의 덕질과 다르지 않은 하나의 취미라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려고 한다. 덕질하는 사람들이 자기 최애를 다른 사람한테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지가 좋아하는 걸 자꾸 강요하는 사람처럼 짜증 나는 건 없지 암.



아울렛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입어봤지만 11년 전과 다르게 갖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케군이랑 ㅇㅂㅇ ;; 이런 얼굴로 마주 보며 어떻게 갖고 싶은 게 하나도 없네? 하며 나이를 실감했다. 결국 케군 티셔츠를 한 장 싸게 사서 집에 돌아왔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 하나 발견했다.
물욕이 없어진다는 것.
다른 사람들이 걸친 것에 관심 가질 시간, 사고 싶은 걸 찾느라고 돌아다닐 시간, 싸게 사려고 발품 파는 시간, 다음 유행을 좇을 시간. 이런 시간들을 다 돌려받는 것 하나만큼은 좋은 거 같다.
근데…. 매일 밤 스포츠카 영상 보는 너랑 매일 밤 피부과 리뷰 보는 나. 자잘한 물욕 아니라 아주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경향이 있긴 해. 이게 뭐야 ㅋㅋㅋㅋ

함박스테이크는 포기하고 다시 휴게실에서 타코야끼랑 커피를 뽑아 마셨다.

태풍을 뚫고 집에 도착했다.
마지막까지 브레이크 경고음은 계속 났고
타고 내릴 때마다 케군이 몸뚱이를 꺼내지 못해 낑낑대는 게 내 웃음벨이었다. 동영상으로 찍어서 하루 보여줬다. 온 가족이 비디오를 보면서 웃었다.

마츠다는 안 사기로 했다는 케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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