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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하버드 대학에서 실시하는 한 연구에 대해 들었다. 사춘기 관련 동영상을 줄기차게 보다가 조선미 교수의 강의에서 봤으니 우연도 아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수백 명을 추적해서 자손의 자손까지 행복한지 조사하는 초대형 연구였다. 고학력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몇십 년 후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열쇠는 무엇인지 심하게 흥미로웠다.
지금도 연구는 진행 중이지만 현시점에서 유력한 결론으로 알려진 것은 불쾌함, 곤란함, 우울감을 겪거나 크게는 삶의 역경을 겪을 때 얼마나 잘 극복하고 빨리 잊느냐였다. 한마디로 회복탄력성이 행복감에 직결된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들어온 말이라 놀랄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같은 영상에서 행복의 기간적 정의를 다시 듣게 된 것이 매우 새로웠다.

행복은 좋은 느낌의 기억이 나쁜 느낌의 기억보다 많을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그 기간이 5년, 10년, 청춘, 젊을 시절. 이런 중장기는 아무 소용없고 하루, 혹은 3~4일 길어야 일주일 정도의 단기적 계산이라고 한다.
20년 후에 명문대에 가기 위해 공부를 해 봤자 20년 후 합격한 날부터 일주일 행복하고 20년 내내 불행했던 것 밖에 더 안된다고. 격하게 공감했다. 오늘 하루 내가 좋아하고 뿌듯한 일을 하는 거부터 정말 급선무라는 것이다.

이 영상을 봐 두길 참 잘했지.
이틀 뒤 일이었다.
영어 레슨이 있었다.
놀랍게도 나 말고 한국 학생이 두 명 더 있었다. 그룹 레슨 다섯 명 중 세 명이 한국인인 기적 같은 날이었다.

나, 그리고 30대의 유리 씨 그리고 장미 할머님. 장미라고 이름을 대충 지어보자. 이분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기억에서 지워버릴 정도로 부아가 나서 본명을 잊었다.
우리는 일본 한복판에 셋이나 한국 사람이 만나다니 신기하다며 첫 만남을 화기애애하게 인사했다. 내가 존경하는 제프리 선생님의 수업이었다. KFC 할아버지의 잘생기고 젊은 버전 느낌의 제프리는 젠틀하고 프렌들리 해서 제프리인가 싶을 정도로 세심하고 자상한 사람이다.

원래 회화 수업 시작 전에 돌아가면서 그동안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몸풀기 프리 토크를 하는데 일본에 사는 외국인 단골 화제 <통칭명>에 대해 이야기가 이어졌다. 일본은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게 되어있지만 우리처럼 한국 아내들은 따로따로 미혼 때 쓰던 성을 쓸 수 있다던가, 대신 통칭명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남편 성을 쓰는 패밀리 네임을 따로 가질 수도 있다는 얘기를 일본 사람들이 들으면 재밌어한다. 나는 외국인 중 (제프리 포함) 유일하게 통칭명이 있었다. 아이가 보건소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가면 엄마랑 애 성이 달라서 친엄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호적 등본인가 주민표를 지니고 다녔던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피를 뽑아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도 물어싸니 귀찮아서 통칭명을 등록했다.
그 얘기를 듣고 제프리가 ’호적‘ 이란 영어가 없어서 자기 느낌의 영어 단어를 가르쳐줬다. 그때 내가
“미국에는 가족 관계나 부모 형제가 한 번에 다 나오는 그런 서류가 없어요?” 이런 질문을 했다. (직계가족이 나오는 서류가 없다니 와오-)
그냥 그런 건 없고 자신의 뿌리는 말로 듣고 입으로 전한다고 나를 보며 대답해 줬다.

다음 순간, 장미 할머님이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동히씨~ 여기 지금 다 수업하셔야 하니까 이제 질문은 고만 좀.”
말썽쟁이 조카 혼내듯 차가운 말을 쏘았다.
”아. 옡. 죄송해요. “

한국어가 오갔지만 일본인도 미국인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다 알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1년 선배도 언니고 웃어른한테 말대꾸하는 거 아니라는 나라법에서 컸기 때문인지 아님 70대 할머니는 너무 할머니라 그랬는지 나는 자동으로 자세를 숙였다.

그런데… 속으로는 공공장소에서 치마가 들춰진 것처럼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즉시 군대처럼 부정적인 대사들이 윙윙 맴돌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를 언제 봤다고 혼내시지. 여긴 일본인데 그리고 영어 수업인데 왜 한국어로 나한테 수업 중에 말하지? 서로 각자 돈 내고 왔는데 우연히 자기랑 안 맞는 그룹 학생이 있어도 좀 참는 게 사회인거지 같은 나라 어린 여자라고 내가 당신 며느리도 조카딸도 아닌데 왜 지적질이지? 날 언제 봤다고?‘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려 하는 그때 회복 탄력성을 떠올렸다.


남이 던진 돌에 내 잔잔한 하루가 일그러지는 건 자존심 상하는 것 같았다. 나의 하루=행복에 느닷없이 진흙발로 쳐 들어와 짓이기고 빼앗지 못하게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먹기까지는 3분가량의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딱 3분 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똘망히 뜨고 수업에 집중했다.

얼굴에 전혀 대미지를 입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당신은 나를 상처 줄 수 없어. 내가 그렇기엔 너무 강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곱씹고 있으니까 정말 아무 타격도 없는 것 같고 고무처럼 공격을 튕겨낸 내가 너무 멋있단 생각까지 들었다. 쫀쫀하고 탄력 있게.

그 일이 있고 10분도 안되어 난 평온을 되찾았다. 다른 질문 없이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궁금한 건 그냥 핸드폰으로 찾아봤다. 선생님이 나한테 질문 있냐고 물으면 번번이 없다고 대답했다. 원래 난 그룹 레슨에 멤버가 많으면 단어 뜻 정도는 핸드폰으로 찾아본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날 배운 표현이 이미 아는 말이어서 특별히 질문할 게 없었다. 근데 장미 할머니는 그게 자기 탓이라 생각했는지 좀 죄책감을 느끼는 눈치였다. (의도한 건 아닌데 쌤통이다. )

수업 막바지에 장미 할머니가 발표를 하고 있었다. 수업 종소리가 딩동댕~ 울리자 다급하게 아직 자기 대답이 끝나지 않은 게 미안한지 막 손을 파닥이며 다른 학생들한테 고멘나사이~ 고멘나사이~ 사과를 했다.
그때 유리 씨와 나는 봤다.
한국 사람한텐 사과 안 하는 거.
쟤네들도 우리랑 똑같은 수업료 내고 수업받고 있는 일본인일 뿐인데 왜 쟤네한테만 미안하다고 하지. 한국사람도 발이 묶여 있는 건 똑같은데요? 그제야 내가 일본사람이었다면 아까 나한테 지적질 하지 않았을 거란 걸 깨달았다. 장미 할머니는 내가 워밍업 시간에 질문하는 게 일본인들 수업에 지장 있을까 봐 불편했던 것이다. 자기 때문에 집에 못 가는 건 오로지 일본 사람들한테 민폐 끼칠까 봐였다.

어떤 인생을 산 거야…
일본에서 뭔 일을 당한 거야…
일본 사람이 생명이라도 구해 준 거야? 그럼 그분한테 가서 잘할 일이지… 왜 모든 일본인에게 굽신굽신 하고 있는 걸까..
유심히 관찰하고 나니 화는커녕 가엾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자마자
“동히씨~ 아유 아까는 미안했어요.”
나한테 바로 사과를 하는 게 아닌가.
본인도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이렇게 바로 사과할 거면서 여기저기 물 쏟듯 하는 경솔한 모습에 또 한 번 실망 아닌 실망을 했다.

“괜찮아요.”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몇 년 사셨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서 여쭈어봤다.
“일본에는 오래 사셨어요? ”
“저는 15년 살았어요. “
”아.. 그러시구나. 저랑 비슷하시네요. 전 18년 살았어요.” (아놔- 일제침략시절부터 사셨는 줄)
똑같은 시절과 세월을 같은 곳에서 보냈지만 나는 날이 갈수록 파워풀해지는 K컬처를 등에 없고 가끔 한국인임을 자랑하고 다닐 정도로 당당한데 장미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 대조적이라는 뜻을 나름 내포한 한 마디였다. 나의 작은 외침은 절대 닿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다른 한국인 한 분이 산 증인으로 모든 걸 다 보고 있었다. 그거면 됐다.
오늘은 나쁜 일도 있었지만 좋은 일이 더 많았다.
나쁜 일이 내 의지로 10분 만에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장금이 언니랑 휴루의 단체 톡에 이 일을 탈곡기 낟알처럼 탈탈 털었다. 내 카톡이 단톡에 비처럼 쏟아졌다. 둘은 연신 기가 막혀해 줬다.
그리고 휴루가 그게 바로 인터넷에서 유명한
”<명예 일본인> 인가 봐요.“
참 찰떡인 신종어를 알려줘서 매우 즐거웠다.
그리고 홍이한테 두 번째 탈곡기를 돌렸다. 내 울룩불룩 거칠고 뜨거웠던 이야기가 껍질을 계속 벗고 반들반들해졌다. 홍이가 어머어머 자기 일처럼 놀라고 명예 일본인이란 말에 배를 잡고 웃었다. 홍이가 말했다. 자기도 기분 더러운 일을 당하면 그날 하루를 망치는 게 아니라 이거 다른 사람한테 빨리 말해줘야지 잽싸게 주머니에 챙긴단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당한 일도 봉변이 아니라 수확같이 느껴졌다.

진짜 별 웃긴 일이 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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