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거의 1년 쯤 된 거 같다. 윰이 두 아들을 데리고 남편 직장을 따라 한국으로 귀국했다. 아직 마치지 못한 대학원 과정은 계속 되었기 때문에 종종 일본에 입국했고 겨우겨우 하루가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신주쿠에서 점심약속을 잡았다.
뭘 먹고 싶냐 했더니, 예전에 먹었던 가부키쵸 근처 우동집이 그립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 간 곳은 하필이면 휴일이었다.
어릴 때 먹었던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이제 어른이 되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새로운 추억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케이오 백화점 레스토랑가를 데려갔다.
순한 수제 두부로 시작해
하트모양 유부가 떠 다니는 (이거 빨리 찍으래 ㅋㅋ)미소시루에 윤기나는 밥
나는 레이디 고젠을 시키고 (고젠 : 정식요리)
윰이는 스키야키 고젠을 시켰다.
언니 나 이런거 온천 여관이나 가야 먹었었는데.
가끔은 점심밥으로 괜찮잖아. 오랜만에 만난 만큼 천천히 맛있는거 먹여주고 싶어.
윰이가 쉽게 다 정리하고 한국에 갔을 거라곤 생각 안했다. 오빠 공부하는 거 자기 학업은 중단하면서 친정집에서 혼자 아이를 들처업고 기다려줬는데. 오빠가 이제 자리잡고 취업하고 아- 이제 내 차례다! 싶어서 신나게 하고 싶은 공부 하려는 찰라, 둘째가 생기고 물론 귀한 보물이지만 그래도 조금 현실이 버거웠으리라. 둘째까지 무사히 일본 보육원에 보내면서 이제 정말 논문도 날개 단 듯 써내려가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오빠는 한국으로의 이직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한국에 먼저 가 있겠다. 네가 공부하면서 케어하는 게 좋다면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모든 가능성을 이야기 해줬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아빠 없이 아이 둘이라니. 떨어져 있는 동안 아이들의 정서적 영향도 미지수이고 엄마 없이 아빠가 종일 밖에서 일하는데 아이 둘을? 이건 더 막막한 일이아닌가. 가족은 다 같이 있어야 하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양보할 수 없는 제1 조건이라면 둘 중에 누구의 위치와 상황이 더 우선순위가 될 수 있을까. 사회적 관념으로 보나 경제적 이유로 보나 답이 정해져있었다.
사실 이 문제로 윰이 상담을 해 왔을 때 나도 같이 신세한탄과 진퇴양난인 상황을 분개하며 펄펄 뛰었지만... 결국 나라도 한국에 가는 선택을 할 것 같다며 흔해빠진 이야기를 하고야 말았었다.
거짓말이라도 그러지 말 걸 그랬나. 나 같은 사람들의 통념이 널 힘들게 한 것 같아... 나도 가담한거야... 1년 만에 만난 윰이 그 동안 한국에서 1년 동안 심한 우울증에 괴로웠다는 말을 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일본에 자주 들어왔을 때 나 안만난거야? 난 정말 네가 교수님만 보고 가느라 바빠서그런 줄 알았어.
어.. 일본 집에 오자마자 2박 3일 체류하면 2박 3일, 눈물만 흘렸어.
울컥했다. 세상에- 아무것도 몰랐다.
이제는 괜찮아?
응, 서서히 좋아지더니 계기는 없었는데 구름이 걷히는 것처럼 나았어.
세상에- 신이시여. 너무나 감사했다.
예전의 윰은 우울증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쁘게 살기에도 모자른데 우울증이라니 나약해 빠진 사람들 한가한 사람들이란 편견이 있었단다. 하지만 자기가 그 ‘감기’에 걸려보니 이건 불가항력적이란 것을 깨달았다. 한 없이 꺼져버리는 자신을 도저히 일으켜 세울수가 없었단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어느 주부인 채로 아침도 안 먹이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누구와도 대화 할 수가 없었고 누구의 도움도 달갑지가 않았고 나와 내 가족을 외부로 부터 차단한 채 어둡고 습한 곳에서 계속 웅크려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언제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것이 데체 왜 가 버렸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어느 날, ‘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하더니, 한국에서도 난 할 수 있는 게 많아. 아니, 하고 싶은게 많아. 신기한 의욕이 어느날 예전 윰처럼 솟았다고 한다.
도움은 커녕 윰의 깊은 한 숨을 눈치 조차 못 챘는데 씩씩하게 일어섰다고 하니 그냥 눈 앞에 기적을 본 것 처럼 벅차고 감격스러웠다.
신주쿠 모자이크길에 있던 너무나 빨간 타이완 타피오카를 먹으며 예전처럼 사소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다. 나는 꼭 이렇게 네가 좋을 때만 옆에 있는 건 아닐까 조금 속상했다. 네가 어려울 때에도 날 찾아줬으면 좋겠다.
케이오센을 타러가는 개찰구 앞에서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라며 꼭 안아줬다. 이걸로 다 갚았다고 퉁칠 순 없지만, 예전에 누군가 나한테 해 줬던 말이었다. 그 때 그 말이 나는 어떤 위로보다 눈물이 났었다.
윰이가 대학원을 졸업하는 날 꼭 찾아가서 꽃다발을 전해주고 싶다.
'대화 하는 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녕 2019년 (18) | 2019.12.31 |
---|---|
디즈니랜드 크리스마스트리 (8) | 2019.12.26 |
[육아편]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약속게시판 feat. Tusbaki salon with Koun (14) | 2019.12.11 |
달로와요 날 보러 와요 (8) | 2019.11.09 |
아들 못지않은 동짱의 심심찮은 오류 (6) | 2019.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