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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에서 시위 행렬이 질서있게 조용히 지나갔다. 일본의 시위행렬에서는 뭔가가 부족한데… 그게 뭘까 하고 관찰해보니 분노가 빠져있는 느낌이었다. 스스로 시간과 에너지를 깎아가며 걷고 있는데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신랄하고 솔직하고 그들의 빡침이 전해지는 건 인터넷 댓글 속에 있다. 한국 사람들은 거기서 도저히 담아내지 못하는 마음들이 흘러내려 오프라인에 모여서 목청껏 소리치는 것 같은데… 비겁하다기보다 진짜 사람들 앞에서 감정 표현을 못하고 안 한다. 케군만 봐도 얼굴에 개인적인 감정이 드러나면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는 사람이다.
예전에 연애할 때 내가 어떤 불만이 있었는데 그걸 꾹 참고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밖에서 밥 잘 먹고 들어와서 집에 가서 막 퍼부은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케군이 감동하더라고. 아까부터 기분 나빴었는데 그거 참아준 거냐고 어른스러운 행동이라며 무조건 자기가 잘못했고 너 잘했다 어화둥둥 어부바 우쭈쭈를 하길래 어리둥절했다. 감동 포인트 희안한좌식이네…
나도 잠깐 어? 그러고 보니 나 왜 밖에서 포커 페이스 했을까 이제 좀 살았다고 일본에 물들었나 신기했다. 그냥 다른 사람 구경거리 만들어주기 싫었던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선 사람들이 싸우는 게 하도 신기해서 온 세상의 구경거리 되기 십상이다. 안 보는 척하면서 모두 귀 쫑긋, 힐끔힐끔 그렇게 재밌는 구경거리가 없다.
그날 깨달았다. 일본 남자 구워삶기 간단하군.
지금은 한 번 감정을 정리하고 객관적으로 따져보기 위해 잠시 묵혀두는 것이 옳다는 것을 배워서 참으려고 노력한다.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지만 필요한 감정 표현을 필요한 타이밍에 하는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군요.
신축하고 10년 정도 지나서 집이 정기 보수에 들어갔다. 페인트 칠 때문에 비닐이 덮여있는 걸 보고 갑자기 등이 서늘했다. 올해 초에 미드 <덱스터>를 시즌 8까지 봤다. 감정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 덱스터가 살인할 때 저렇게 비닐로 싸맨 방에서 작업을 한다. 나쁜 놈만 죽인다는 신박한 전제가 있어서 사이코 패스가 주인공일 수 있다.
잔인한 스토리를 못 보는 내가 덱스터를 신나게 본 이유는 범죄 수사물을 좋아하고 권선징악을 기본 좋아하는데 감정을 못 느끼는 캐릭터를 내가 다 좋아한다는 걸 최근 알게 됐기 때문이다. 소설 <아몬드> 주인공이랑 미드 <웬즈데이> 자폐 의사 <굿닥터> 우영우도 당연히 좋아하고 드라마 <비밀의 숲> 조승우 역할. 사이코 패스든 자폐든 아무튼 두려운 감정이나 좌절, 슬픔을 잘 못 느끼는 캐릭터가 나오면 다 좋아한다. 주인공한테 이입되는 우울감 없이 스토리 전개에 집중할 수 있다. 막 같이 벌벌 떨면서 보지 않아서 노 스트레스..? 나 같은 사람 있을까. 허허.
쇼핑하고 혼자 밥 먹으러 들어간 백화점 식당 맞은편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일본에 사는 딸을 만나러 온 어머님이신 거 같았다. 50살 쯤 되는 딸과 엄마는 저런 느낌이구나. “엄마, 일어나지도 않은 일 걱정 좀 하지마. 엄마는 너무 부정적이야. 그런 걱정하면 뭐해 정신건강에만 나쁘지. ” 마치 엄마가 아이한테 하는 잔소리를 딸이 늙은 엄마한테 인생 선배처럼 하셨다. 엄마는 “니가 나보다 똑똑하니까~ ” 하며 그래그래.. 배우시듯 끄덕이셨다. 저렇게 반대가 되는구나. 그런 순간도 오는구나. 내가 하루한테 하듯 밥 다 먹은 엄마 입 닦아주고 소지품 잊어버린 거 없나 보고 엄마를 챙겨 나가셨다. 나이들어서 가질 수 있는 엄마와의 새로운 관계가 정말 부러웠다. 신기했다.
방 청소 하고 집에서 카레 한 접시 먹은 날.
케군이랑 둘이 동네 피자집에 갔었다.
새로 생긴 데였고 좀 신기한 곳이라 약간의 도전이었다. 전 세계 캔맥주를 냉장고에 전시해 놓았는데 한 캔이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아마 현지 가격의 10배는 되는 것도 있을 것 같다. 의자랑 테이블은 좁고 높았다. 등받이도 없고 포장마차 철제 의자 같은 불안정한 구조에 메뉴도 어려운 영어로 휘갈겨놓고 설명이 없었다. 뭘 어찌 주문해야 할지 몰라 주인분께 이게 얼마나 되냐고 물어봤다. 00cm입니다. 단답형으로 메뉴에도 쓰여 있는 말을 앵무새처럼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한 사람이 먹을 양인지 두 사람이 먹을 양인지 다시 물으니
“사람마다 다르겠죠.”
풉.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서비스는 하기 싫고 사람 대하는 거 개 싫으니까 신기한 맥주 하나에 왕창 돈 뜯어서 어떻게든 생계를 이어보겠다는 심산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내 헛웃음을 눈치챘는지 다시 접객하는 척을 했다. “ 큼큼 뭐… 어떤 분들은 혼자도 다 드시겠죠. 근데 전 다 못 먹습니다.” 되게 뚱뚱한 주인아저씨의 마지막 말이 개그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샐러드 하나 피자 하나를 시켰다.
케군이랑 둘이 ‘여긴 좀 아니다..’라는 눈빛을 교환했다. 조막만 한 피자가 나왔다. 와… 솔직히 저 아저씨 이거 세 개 먹는다. 세 판은 앉은자리에서 먹는다. 진짜 뭐냐 이 크기 나도 두 개는 먹겠네. 저렇게 장사를 못하다니.. 자기는 다 먹을 수 있다 해야 우리가 두 개를 시키지.
근데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음식 장사를 할 생각을 했구나.
신은 요리 솜씨를 주셨으나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장사 수완을 주지 않으셨다. 먹고 있는데 뒤에서 알바를 쥐 잡듯 잡는 뚱땡이 주인아저씨 소리가 계속 들렸다. 아무리 맛있어도 아르바이트생 괴롭히는 가게는 망해야 맞다. 다신 안 간다. 나중에 구글 리뷰를 보니 여러 종류의 불만이 쓰여 있었다. 가격이 깡패다. 주인이 말이 안 통한다. 눈치 보인다. 등등. 보고 갈 걸…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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