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대화 하는 여자

시련의 바베큐

Dong히 2022. 6. 2. 12:23

얼마 전에 이케부쿠로 파르코(쇼핑몰) 옥상에 생긴 코리안 바베큐를 다녀왔다. 일주일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지난 포스팅 참조. 말해두지만 원인은 너다 ㅋ 확실히 하자) 케군을 위로하려고 만든 자리. 한국음식을 바깥에서 직접 구워 먹고 술이 무제한이라.. 이거슨 케군에게 맞춤 메뉴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1인당 4500엔 <코리안 바베큐플랜>를 골랐다. 아이 요금은 절반 정도인데 고기는 당당히 3인분이 나온다. 고기, 야채, 상추, 김치, 마늘, 쌈장, 나물, 부침개가 포함되어있다. 한국 고기 문화의 요점을 아주 잘 파악했어! 너무 기대된다. ㅇㅅㅇ
그런데 … 예약시간 7시 15분에 잘 맞춰 도착했건만 입장을 못하고 계속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오픈한 지 3일째라 그런가…
드디어 긴 줄 끝에 우리 차례가 돼서 돈을 내고 안내를 받았다. (선불제)

현재 시각 예약시간에서 30분 지난 시점.
배정받은 우리 테이블에 가 보니 앞 손님이 남긴 것들이 그대로였다. 불길하죠?
어이없었지만 일단 지켜보았다. 중국인 알바 언니가 매우 당황하며
-죄송해요. 죄송해요. 지금 바로 치워드릴게요.
물티슈랑 소독제 그릇을 담을 깊은 트레이를 얹은 수레를 끌고 와서 밥그릇을 두 개 넣었을 때 다른 손님이 뭔가 부탁하며 불렀다.
-잠시만요! 금방 다시 올게요.
도도도도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언니 대신에 나는 그릇을 싹 수레에 싣고 물티슈로 테이블을 반짝반짝 닦아놨다.
-죄송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오픈한 지 얼마 안돼서 많이 힘드신가 봐요.
-네… 여러 가지 착오가 많았어요.. 아.. 지금 생맥주가 다 떨어진 거 같더라고요.. 맥주 새로 올 때까지 좀 기다리셔야 하실 수도 있어요.
-아.. 그렇구나.. (동공 지진) 알겠습니다~

자 이제 테이블에 일단 앉았으니 음료수를 가지러 가 볼까? 여기 시스템은 바텐더가 있는 음료코너로 직접 가지러 가야 했다. 음료 줄 서는데 소요된 시간 10분.역시 생맥주는 없고

8시 15분 아직 음식 안 나옴. 미쳐버리겐네. 다시 말하지만 예약한 시간 7시 15분. 케군이 입구에서 준 시간표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우리는 90분 코스니까 원래 7:15분부터 8:45분까지 먹어야 하는데 표에는 21:20분까지라고 써 있었다. 처음부터 식사가 지연될 것을 각오하라는 듯한 메시지. (설명은 없었음)
그리고 무려 예약시간 1시간 30분이 지나고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이런 최악의 식당을 경험하신 적 있나요?

그런데 미리 반전을 말하자면 나는 이날 최고로 기분 좋은 경험을 했다. 솔직히 복도에서 입장하기도 전에 불길한 예감은 시작되었고 음식이 안 나올 때 슬슬 화가 나려 했지만 오늘은 무조건 케군의 날이고 나는 본연의 목적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나를 달랬다.
케군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분노나 불만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불이익일지라도 말이다. 케군의 논리에 의하면 장기적으로 결국 그 사람들은 망하게 되어있다. 어떤 식으로든. 조용히 망하든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컴플레인으로든. 만약 의도하지 않은 일이라면 괜히 화를 내서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일이 되니까 이 가능성도 생각안 할 수 없다고.
똑부러지게 말해서 손해를 찾아오는 일이 아니라면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케군이 늘 강조하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손해를 찾아오되 감정은 드러내지 말고, 말해도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말도 감정도 아끼라고 했다. 나는 오랫동안 케군과 함께 하면서 케군의 논리가 옳았다는 것을 많은 상황에서 목격했고 나도 그러기로 매번 다짐했었다. 오늘은 더욱이 케군의 날이니까 굳게 다짐 또 다짐했다. (진짜 다짐까지 안 하면 이러기 쉽지 않다는 게 한심하기도 했다. ㅠㅠ 냄비근성 정말..)

그날 가만히 이 혼돈의 아슬아슬한 장 안에서 내 영혼을 살짝 틀 밖으로 밀어 관망해 보았다. 우리랑 비슷한 시간에 입장한 손님들도 아주 많았다. 모두 똑같이 1시간을 기다려 음식을 받았고 맥주가 바닥난지는 꽤 지난 거 같았다.
이야기하는 사람들, 조용히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 음료수로 배고픔을 달래는 사람들. 아무도 불만을 이야기하거나 매니저를 불러달라거나 혀를 차지 않았다.
하루가 배고파했지만 웃으면서 기분 좋은 밤공기를 느껴보라고 했다.
-ㅎㅎㅎ 다들 우리랑 똑같이 기다리나 봐. 직원들이 우왕좌왕이네.
여유가 가득한 얼굴로 케군에게 웃어 보였다.
(나를 믿어봐. 나는 지금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어.)
케군도 활짝 웃었다. 우리 마누라 최고다.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음료수를 받으러 갈 때마다 하나의 시련이었다. 긴 줄이 항상 있었고 갈 때마다 뭐가 하나씩 품절이었다.
그때 내 뒤에 줄 서 있던 남자 대학생 세 명의 대화가 들려왔다.
-와.. 술 마실 때마다 이렇게 줄을 서야 하다니.
터프하게 한마디 뱉고 바로 뒤이어
-알바생 완전 불쌍해. 둘이서 음료를 다 하냐. 감바레.
힘내란다. 난 스무 살 때 저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었나?
-저기 뒤에 술 만드는 사람한테 직접 말하면 되지 않나? 앞에 여자 직원은 왜 가운데서 주문을 받는데? 그걸 또 손으로 적어… 엄청 힘들겠다.
문제 지적 한참 하고 마지막에 안쓰러워한다. 착하다.
내 차례가 되자 내가 다 못 들고 갈까 봐 뒤에 있던 학생들이 말했다.
-들고 가실 수 있어요? 도와드려요?
착해 ㅠㅠ 직원이 모자라니까 손님끼리 서로서로 도와서 잘 먹고 가자는 결의가 전해지는 거 같았다.
-괜찮아요. 고마워용. ;ㅂ;

생각했던 것보다 한참 늦은 밤에
시작한 저녁밥이지만

고기 양념이랑 김치, 쌈장이 너무 맛있었다. 내가 알 수 없는 뿌듯함과 따스함에 취해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 케군도 무지무지 기분이 좋다고 했고 그날의 부산하고 어지러웠던 일보다 내 뺨에 닿은 기분 좋은 봄바람과 적정한 기온이 훨씬 내 머릿속에 남았을 만큼 마음이 평온했다.

꺼진 가스불을 갈아주러 온 직원 언니에게
-오늘 직원분들이 많이 힘들어 보이네요. 저희가 너무 늦은 시간에 예약해서 좀 지연된 걸까요?
물으니까,
-아뇨. 사실은 오늘 오픈 시간부터 이런 상황이었어요. 너무 죄송해요. 저희가 반값 이벤트를 해서 생각보다 너무 많은 손님들이 오셔가지고요. 변수가 많았어요.
-아~ 이른 시간에도 그러셨구나. 너무 힘드셨겠어요
-오늘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기분 좋은 날씨잖아요.
나의 이해한다는 말을 들은 케군과 하루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ㅋㅋ( 가끔 하는 짓 데칼코마니)

어른처럼 같이 한참을 기다리고 배고픔을 참아야 했던 하루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이런 경험도 좋은 거 같애.
-왜 그렇게 생각했어?
-엄청 좋은 추억이 될 거 같애.
일곱 살의 감동적인 발언이 훅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효과였다. 나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신상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신 적이 있다.
아이의 ‘기다림’의 한도 치는 부모가 정한다고 하셨다. 부모가 기다릴 수 있는 시간만큼 아이도 기다림을 배운다고.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는 그렇게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항상 일에 쫓겨 엄마의 하루 일과를 다 끝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여유 있는 밥 한 끼, 여유 있는 장보기, 심지어 놀러 가는 날도 여유 있는 여행을 못했다. 집에 가서 할 일이 계속 있었기 때문이란 걸 안다. 나는 그걸 쏙 빼닮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고쳐볼 거다. 늦지 않았겠지. 그렇게 믿어야지.

마지막에 출구를 나가는데 매니저가 뛰어와 정중히 고개 숙이며 오늘 정말 죄송했습니다. 하셨다.
-아닙니다~ 음식들이 너무 맛있었어요. 양도 넉넉했고요. 그런데 저희가 사진으로 볼 땐 소시지가 있었는데 오늘 소시지가 다 떨어졌었나 봐요?
-아!!! 소시지 안 들어있었나요? 이런… 아.. 죄송해서 어쩌죠.
-아! 저흰 소시지 없어서 고기 많이 주신 줄 알고 ㅎ다음에 챙겨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시지는 다 떨어진 게 아니었다. 그건 좀 미리 말할 걸 그랬다고 케군한테 말했고 케군이 그러게 ㅋㅋ 엄청 기분 좋게 웃었다. 얘는 오늘 계속 이렇게 웃는다. 생맥도 못 마신 놈치곤 아주 기분이 좋다. 케군이 담에 또 오자면서 배를 두들겼다. 하루가 뭐 몸에도 안 좋은 소시지 안 먹어도 돼~ 내 평소 입버릇을 따라 했다.

우리는 온 가족이 힘을 합쳐 그 어떤 위기와 시련에 맞서 싸우고 승리해서 돌아온 듯한 단합감마저 느끼며 집에 돌아갔다.

사람의 기분은 상황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기분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타인은 나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줄 수 없고 우리는 타인의 행동이나 말과 상황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국 본인이 본인의 기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