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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경에는 생각했었다. 올해 마지막 포스팅에는 1년 동안 이뤘던 것들 줄줄이 나열하며 뿌듯해해야지. 그런데 한 해의 끄트머리에 다 닿아서 단 한 가지만 잊지 않게 정리해둘 것이 생겼다. 나열하려던 것들은 전부 부질없어졌다.
얼마 전에 흥미로운 인터뷰 스크립트 일을 받았다.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인 '자존감 수업' 저자 '윤홍균' 선생님의 일본 잡지 인터뷰였다. 자존감 수업'은 <どうかご自愛ください。自尊感情回復レッスン>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상냥하고 지적인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가 다 주옥같은 선생님의 말씀에 타이핑하는 것도 잊고 녹음 파일을 듣고 있었다.
기자: 선생님 자존감 낮은 사람들의 특징은 뭐가 있을까요?
선생님: 눈치를 많이 보죠. 자신의 감정에도 확신이 없어서 지금 내가 화를 내도 되나? 불쾌해도 되나? 다른 사람에게 묻기도 해요. 의존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러다 보면 일방적이기 때문에 상대방과의 관계도 잘 유지 못하고 전혀 득을 주지 않는 상대에게 의존을 하다 낭패를 보기도 해요. 연애에 관해서도 그래요. 자신이 항상 매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멋진 사람이 고백해 오면 불편해요. 왜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하는 거죠. 그리고 멋없는 사람이 고백하면 또 멋이 없어서 그것도 불편합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멋진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지 않으니까 결혼생활 내내 불편하죠.
불현듯 머리 속에 스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 쏘이 언니가 내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당장 메세지를 보냈다.
동: 언니 내가 미친 소리를 좀 해도 될까? 언니가 예전에 댓글로 나한테 “너 자존감 대박 높아” 박력 있게 글을 남겼었는데 빈말이고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거든 공감이 안됐어.
언니의 블로그는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내 블로그에 비해 사소한 일상이 문학 같고 맞춤법 하나 틀림없었다. 당장 출판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글을 쓰는 언니를 동경했었다. 언니의 말도 그랬다. 통화하고 있으면 팟캐스트를 듣고 있는 듯 빠져들었다. 내용도 지적이고 템포도 훌륭했다. 그런 사람이라 칭찬하나도 참 세련되게 한다고 그냥 흘려들었다.
쏘: 앗 동히다. 아냐 빈말 ~ 진심 ㅎㅎ
동: ㅋㅋㅋ 나야~ 근데 언니 보는 눈이 대단한 거 같아. 이 재수 없는 문맥 뭐지 싶지?
쏘: 어 ㅋㅋㅋ 뭔일 있었냐곸ㅋㅋ
동: (중략) 이런 이런 일을 받았는데 자존감 낮은 사람의 특징이 나는 하나도 없어.
(자존감 낮은 연애의 특징 중략) 근데 나는 늘 지 처지는 생각도 안 하고 항상 나보다 나은 남자 잘난 남자 만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거든.
그런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곧이 곧대로 ‘그렇지,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복수의 이성이 나를 좋아한다면 당연히 다음 스테이지는 그중에 가장 인격이 훌륭하고 환경과 조건이 좋은 남자와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 그리고 언니… 심지어 지금까지 난… 내가 케군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있다고 늘 생각하거든???
쏘: 대박이다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참 어이없다.
동: 미친거 같다 나 ㅋㅋㅋㅋㅋ
쏘: 자존감은 자기 속에 있는 거 같아. 남들이 봤을 때 쟤는 뭘 가졌고 뭘 못 가졌고 그런 비교가 무색하게 자기 안에 있는 거랄까? 내가 너 보면서 자존감 높다 생각한 건 늘 모르는 걸 모른다 하고 알려달라 하고 또 그러던 경험을 아무렇지 않게 남에게 얘기하는 용기가 아무나한테 있는 게 아닌데 싶어서. 이런 거 모르면 쟤가 날 뭘로 볼까 싶어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잖아. 근데 그런 쟤가 날 뭘로 볼까 따위는 신경 안 쓰이는?
동: 와…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 그러고보니 정말 신경이 안 쓰이는군.
쏘: 왜냐면 너는 너가 모르는 걸 배워서 아는 게 더 중요하니까
동: 오 맞아… 빨대 꽂아 빨아 먹을 생각만 했어. 나 이거 여기서 알아가서 다른 애한테 써먹어야지
쏘: 거 봐 ㅋㅋ자존감의 중심은 너니까.
이렇게 재밌게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 날 다시 스크립트 일을 이어가는데 뒤통수를 후려치는 내용이 들려왔다.
선생님: 우리는 성장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자존감이 낮아집니다. 하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시험에 떨어지고 실연을 당하고 실패를 하죠. 그때마다 우리 어머님들은 위로해주고 공감해주고 그건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해주면 됩니다. 깎여도 괜찮아요. 왜냐면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태어나면 굉장히 자존감이 높습니다. 철이 없는 거죠. 철이 없이 자존감이 높은 상태인 거죠. 그래서 건강하게 자연스럽게 여러 실패를 겪으며 자존감이 깎이는 것은 나쁜 게 아니에요. 바꿔 말하면 집에서 일부러 아이가 밖에서 크게 절망할까 봐 세상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고 자존감을 깎는 말을 하고 심하게 비난할 필요가 없어요.
동공이 휘둥그레지고 머릿 털이 삐쭉 서는 느낌이 들었다. 말이 비수처럼 박힌달까 주변의 언어들이 옅어졌다. “철이 없는 거죠. 철이 없는 자존감”이라는 말만 뚜렷하고 강력하게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렇게 완벽하게 아귀가 맞는 느낌도 인생에 몇 번 없을 것 같다. 전류가 흘렀다. 나는 나를 완벽하게 설명당했다.
직후, 너무 시원해서 웃음이 나왔다. 통쾌했다. 마치 어디가 아픈지 몰라서 무슨 약을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드디어 병명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니 어쩐지 이상했다. 내 이야기가 같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나는 백 프로 철이 없는 사람이었다. 드디어 알았네 내가 그동안 왜 그랬는지.
내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후한 점수를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격스럽고 감사할 따름이다. (쏘이 언니 정말 고마워요. 그 칭찬 제 맘에 박제할게요)
나는 남을 배려하면서 자신을 소중히 하는 자존감 높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나 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인 쪽이 더 많았다. 그래서 나를 알았으니 2022년에 할 일은 뚜렷해졌다. 진짜 멋지게 자존감 높은 사람이 돼보자.
그리고 또 덧붙여하고 싶은 말은 사람들을 배려하고 먼저 챙기느라 자기 순서가 뒷전인 사람들이 잠들기 전 나는 왜 항상 손해만 보는가 하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의미로 여러분은 자존감이 낮은 게 아니라 철이 아주 많이 일찍 든 것은 아닌가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도 내년에는 조금씩 지금보다 더 그렇게 살고 싶다.
모든 것이 부끄러워지는 연말이었습니다.
이제 제 병명을 알았으니
열심히 치료해 보겠습니다.
2021년도 철딱서니 없는 제 이야기 있는 그대로 읽어주시고 (참.. 욕 한번 안 하고.. ) 우리 부처 독자님들 감사했습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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