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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작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있지만 내게 인생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신상은 마치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화수분 같은 경험치 만렙의 소유자다.

늘 수업하기 전에 짧은 작문을 해 오는 신상의 보물 노트를 폈다. 일기처럼 일상 이야기가 쓰여있을 때도 있고 책이나 영화 이야기가 적혀있을 때도 있다. 그날은 딸아이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신상에게는 30대 딸이 있다. 딸은 여자 중학교에 진학했다. 장신의 탄탄한 체구로 ‘아름다웠다.’ 그렇게 한글로 아름다운 몸이었다고 표현하셨다. 그런데 가장 민감한 나이에 무서운 속도와 정도로 여론이 침투하는 여학교에서 딸아이는 다이어트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먹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게 됐고 머지않아 거식증으로 이어졌다. 가족들은 점점 심각해지는 딸아이의 식이장애에 모든 생활이 무너져갔다. 물 한 모금을 겨우 넘기는 지경에 이르러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정신과를 찾았다. 그냥 몇 달 동안 인생에 스치듯 있었던 일이 아니라 무려 4년 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정신과 선생님은 굉장히 성실한 사람일수록 이런 일이 생긴다고 했다. 사춘기 여자애들 말에 인생이 좌우되는 것은 그녀가 착하고 성실했기 때문이었다. 딸아이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동시에 딸에게는 비밀로 하고 가족들도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온 가족이 합심해서 이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연계되어 있는 큰 사립학교여서 고등학교는 문제없이 진학했지만 거의 등교하지 못했다. 4개월씩 두 번의 입원도 해야 했다. 생명력이 희미해질 정도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어서 사망 직전의 체력까지 갔다. 더 무서운 건 사고력과 기억력도 제 기능을 못했다. 아이는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기만 할 뿐 대화도 못하고 생각하는 일도 불가능해 보였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물어보면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뼈만 남은 모습으로 수액에 의존해서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겼다. 어떻게 키운 아이인데 그런 모습을 4년 동안 지켜봐야 했다니 얼마나 많이 울었냐고 물었다. 신상은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간이었다고 했다.

딸아이는 그러다가 점점 음식물을 먹게 되었고 그냥 아무 계기도 어떤 특별한 기점도 없이 점점 살아났다. 회복의 속도는 빨랐다고 한다. 아무도 이유는 설명하지 못했다. 고3이 다 되어서 마지막 1년 간 그녀는 학업을 따라잡고 성실함과 근면함을 십분 발휘해 졸업에 성공했다. 하지만 정말 가고 싶었던 디자인 전문대학교는 고등학교 출석률이 너무 안 좋아 입학하지 못했다. 대학 따위 무슨 상관인가. 신상은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는 딸아이가 안쓰러웠지만 눈앞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완벽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음악가로 사는 것이었다. 드럼과 악기를 다루고 여러 스튜디오에서 연주를 하다가 같은 음악가와 만나 스무살 때 아이를 낳았다. 얼마 안가 첫 번째 결혼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살아있으니까 괜찮다. 게다가 손주까지 그 생명을 이어받았다. 손주를 키우는 일은 거의 신상의 몫이 되었다. 사실 신상에게 육아는 참 적성에 안 맞는 분야였다. 아이의 마음을 공감하는 일도 서투르고 특히 남자아이의 자유분방함은 이해가 안 돼서 한숨만 나왔지만 죽을 뻔하던 딸의 지난 시간을 생각하면 그 임무를 달게 받을 수 있었다. 딸아이는 소극장에 취직해 음악 쪽 일을 하면서 예전보다는 안정적인 수입이 생겼다.
그리고 얼마 전 두번째 결혼을 했다.

나는 무례함을 양해받고 물어봤다.
-남자분은 초혼이였어요?
-네
-제가 참 촌스러운 사람이라서 궁금한데요, 재혼에 아이도 있는데 그쪽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축복받았나요?
-저도 걱정했는데요..

그리고 뒤에 신상은 ‘딸의 남편’이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해 오셨다.
남자는 어느 지방 교회 목사님 아들이었다. 굉장히 유복한 가정이었고 부모님들은 법 없이 살아도 될 정도로 온화한 분들이라고 한다. 그런 집의 외동아들이었다. 그러다 성인이 되고 나서 순탄한 남자의 인생에 큰 사고가 있었다. 남자는 하루아침에 반신 불구가 되었다. 허리부터 발까지 하반신은 전혀 움직이지 않아 침대에 누워 지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재활에 성공해 몇 년 후에는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사고였는지 어떻게 회복했는지 자세한 건 물어보지 않았다. 힘들었던 기억을 꺼내게 될까 봐 조심스러우셨다고 한다. 그 후, 온실 속 화초처럼 지낸 자신의 환경을 바꾸고 싶어 스스로 도쿄로 상경해 혼자 힘으로 지내다가 딸아이를 만났다.

딸아이와 손주가 남자의 집에 인사를 갔을 때 남자의 부모님은 환하게 맞으며 사랑이 넘치는 환대를 해 주셨다고 한다. 첫 상견례 자리에서는 아들의 첫 결혼에 매우 흥분하신 두 분을 앞에 두고 신상 가족은 우린 처음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기대하지 않는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힘들었다고 한다.
- 그 분들이랑 온도 차이가 심해서 진짜 미안했어요
-아 진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딸아이의 상황을 그쪽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남자의 반신 마비였던 과거를 듣고 신상은 납득했다. 누구보다도 납득했다. 아이의 대학도, 직업도, 결혼도 목숨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경험했으니까.
지금 이렇게 살아있어 주는 것이 가족과 자신을 위하는 가장 큰 일이라는 것을.

신상과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살아있어주는 하루와 케군에게도 감사하고 바라던 갖은 욕심들이 날아가는 기분도 있었지만… 내 가족들을 위해 내가 제일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은, 내가 나를 소중히 하고 건강하게 살아있는 일이기도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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