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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가 계획한 여행 가자고 하면 갈 거야?
-그 계획이 실현가능한 거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신나진 하루가 노트북 앞에서 뚝딱뚝딱하더니 구글킵에 여행 플랜을 공유해 왔다. 집에서 나가는 시간부터 세세한 일정까지 완벽해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어디 순간이동이라도 해야 하는 뜬금없는 스케쥴이 아니었다. 밥은 어디서 먹을 거며 혹시 모르는 일을 대비 한 준비물까지 적혀있었다. 안 갈 수가 없네.





승차장 번호, 주의 사항, 정확한 열차 스케쥴까지 자세하다. 역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난 읽지도 못하겠는데 다 찾아보고 타이핑까지. 언제 이렇게 컸어. 어흐으으윽....


시키는 대로 2시 3분에 열차 타고 간식을 먹으며 갔다. (스케줄에 써 있었다 ㅋ)

내가 서점에서 사 준 노선책. 전국에 있는 전철이 모두 나와있다. 시골에서 조용히 운행하고 있는 짧고 소박한 전철들이 구석구석 정말 많았다. 하루는 평생이 걸리더라도 다 한 번씩 타보고 싶단다.
와... 그런 여행도 참 좋겠다.
영화 <셰프>에서 주인공 요리사가 아들이랑 같이 뉴올리언스의 음식을 먹으러 찾아가는 여행 (겸 장사) 장면이 있었다. 베녜라는 디저트였는데 설탕 잔뜩 묻힌 튀김 빵? 나는 꽈배기 도넛 맛이지 않을까 상상했었다. 진짜 그런지 음식을 먹으러 가는 여행도 한번쯤 너무 해 보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 해 보고 싶은 여행은 영화나 미드에 나왔던 배경지에 가 보는 것이다.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보고 타이완의 단수이에 갔던 적이 있다. (20년은 족히 됨) 주걸륜이 나온 거기!! 얼마나 벅차던지. 그냥 봐도 예쁜 노을이 한결 황홀했었다.
<아사히가와 동물원 이야기 : 펭귄이 하늘을 날다> 영화를 본 후 북해도 아사히 가와 동물원에서 실제로 펭귄을 만났을 때도 괜히 벅차고 더욱 귀여웠었다. 얘들이... 그 동물원 사람들이 지켜낸 걔들이구나... 펭귄이 노을이 그냥 펭귄 그냥 노을로만 끝나지 않은 여행 경험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습관적으로 어떤 미드나 영화를 볼 때 거기가 어디서 촬영했는지 꼭 찾아보고 기록했다.
<He's all that> 하이틴 영화에 나왔던 유니온 역이라던지 (엄청 유치함. 인기녀가 머드남 메이크 오버 시켜서 인기쟁이 만드는 내기로 시작. 이런 내용... 좋아함.) <플레이어> 에서 주인공 멕켄지가 저널리스트 꼬시려고 작업 건 McNally Jackson Books Seaport라는 서점 ㅋㅋㅋ (이것도 가벼운 코미디지만 흥 많은 캐릭터들 때문에 세 번을 봤다!) 이라던가.
아무튼 언젠가 미국에 있는 영화 로케촬영지에 가 보는 여행을 고대하는 중.


날이 흐려 어둑한 집에서 화장을 했던 날. 그래서 바른데 또 바르고 정신을 차려보니 떡칠을 했지 뭐야. (사진은 멀쩡해 보이지만 아님) 에이 뭐, 선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그 얼굴로 그냥 나왔더니 하루가 슬금슬금 얼굴을 뒤로 빼며 나랑 거리를 만든다.
-엄마.. 오늘 얼굴이... 왜 그래? 너무 빨갛고.. 너무...
-왱? (ㅎㅎㅎ)엄마 얼굴 어떤뎅?
-음... 한국 사람처럼 화장하려다가 실패한 일본 사람 같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저 문장 그대로 말했다. (그 자리에서 메모장 켜서 적어 놓음) 웃음 포인트가 너무 많아 정신을 못 차리겠네. 한바탕 뭔가 지나간 뒤 되짚어 보니 너무 심오한 게 아닌가. 생각보다 하루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사람들의 화장이 평균적으로 고퀄이란 것도 알고 그런 화장법이 트렌디하고 내추럴해서 일본사람들이 따라 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듯.


신기한 역을 지나갔다.
아네가사키.
언니가 먼저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둘째로서 매우 서럽네.
아 맨날 왜 언니만 먼저 챙겨줘.
실제로 어렸을 땐 맨날 언니 위주로 돌아가서 짜증 났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엄마가 일단 언니 육아를 먼저 하면서 여러 가지 실패해 보고 나는 재도전한 셈이라 결과적으로.... 이득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언니한테 아득바득 집착하고 기대했던 것들이 다 마음처럼 안된다는 것을 알게 돼서 나에겐 그 어떤 욕심도 없어 보였다. 던져놓으니까 알아서 큰 것 같았단다. 때 되면 취직하고 살가운 남친 엄마 보여주고 (걔가 우리 엄마한테 정말...애교도 잘 부림. 지금 남편은 아님 ) 친구 사귀고 돈 모아 유학 갔다. 엄마는 그런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반대로 언니는 남자 친구를 보여준 적도 없고 친구가 있는지 의심스러웠으며 한 회사를 오래 다니지 못해 인생의 반이 백수였다. (갑자기 언니를 헐뜯고 있는 흐름인데 아니고요) 언니는 언니대로 엄마랑 상극인데 기대까지 한 껏 받아 지옥 같았다고 한다. 언니는 엄마랑 따로 살기 시작하면서 비 오듯 쏟아지는 잔소리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행복해 보였다.
첫째 아니면 막내라고 누구 하나 유독 잘해주지도 말고 그냥 기대 없이 숨 쉬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키우는 게 정답이란 생각이 든다.


치바현에 있는 키사라즈 역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우리의 목적인 노선으로 갈아탄다. 한 시간에 한 대 오는 시간표.
쿠루리라고 하는 전철이었다.
이름이 느므 귀여워 쿠루리~ 지브리 같은 이름이다.

역 주변이 급격히 시골 바이브



노랑X초록



우리처럼 특이한 로컬 전철을 탐방하러 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마저도 비가 와서 아주 적었다. 가끔 이걸로 통학 통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게 없어지면 곤란해지는 지역 주민들도 많겠지만 일단 없어지면... 슬플 정도로 귀여운 전철이었다.

<운전사에게 말 걸지 말아주세요.>
얼마나 많은 오타쿠들이 말을 걸길래 ㅋㅋㅋ 저런 안내문 처음 봤다. 외향인 오타쿠들일세.








종점까지 가 봤다.
여기는 교통카드 기계가 없어서 탑승할 때 꼭 종이 승차권을 사야 했다. IC카드 안 되는 역 처음 봤다. 이것도 하루가 다 사전 조사해서 실수 없이 구입할 수 있었다. 그날 정말 애가 이렇게 컸구나 큰 실감을 했다. 내가 뇌를 내려놓고 졸래졸래 따라다니기만 하는 날이 오다니...





쿠루리선 관광 온 여러분들.

다시 종점에서 중간 환승역까지 이동했다.
여기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쿠루리 선을 타고 온 길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치바역 쪽 강우량이 점점 거세지는 영향으로 전철 운행이 멈췄다.

운행을 안 한대.
음?
어?
이 시골에 열차는 이것밖에 없는 거 아니었어요?
그럼... 우리... 는...?

다시 움직일 수도 있는 건가?
모두가 상황을 지켜보면서 역 주변을 서성였다.

하루가 어느 블로그에서 봤다며 역 근처 우물에 끌고 갔다.
-엄마 여기 물이 엄청 맑고 깨끗해서 일부러 물 뜨러 오는 사람도 있대.

물을 담아간다.
“응~ 그렇구나.”
하이고~ 참 내 별 걸 다 해 보고 싶다고. 저거 먹을 수 있는 거 맞아? 무겁기만 하지.. 쯪쯪...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있는 곳엔 보슬비만 내리길래 솔직히 금방 다시 출발할 줄 알았다.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주먹밥을 먹으며 눈치를 보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역무원에게
“여기 근처에 치바로 가는 시외버스 다니지 않아요?” 말하는 게 들렸다. 살짝 지도를 찾아보니 가까운 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느낌이 왔다. 결단이 필요하다. 전철을 뒤로하고 아저씨를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가끔 오는 시외버스가 운 좋게 8분 후에 왔다. 버스비가 2000엔?! 금액에 놀랐지만 왠지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란 예감이 들었다.



아직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이걸 타고 치바역에 가서 집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쿠루리선 더 못 타서 아쉽네...
이러고 있는 우리.
그런데 점점 버스 안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뉴스 속보는 심각해졌다. 도로에 차들이 느릿느릿 속도가 더뎌지더니 바깥에 번쩍번쩍 쉴 새 없이 번개가 내리치는 걸 보고 보통 일이 아니란 걸 알았다.
장거리 버스라 화장실이 안에 있었다.
2000엔짜리 버스 인 게 진짜 다행이었음!!!

속으로 혀를 차던 물은 우리의 생명수가 되었다!!!
저 물 없었으면 우리 말라죽었을 뻔!!!!

40분 거리를 3시간 넘게 걸렸다.
천둥 번개가 너무 쳐서 호러였다.

도로가 점점 침수되고 있었다.
반대쪽 도로는 승용차들이 후진을 시도하고 있었다. 다음날 치바 전역에 침수된 차가 1000대를 기록했다. 평범한 비가 아니었던 날....
회사에서 퇴근하면서 뉴스 속보를 접한 케군이 급하게 연락을 했다. 여차하면 퇴근해서 렌터카로 데리러 오겠다고 하는데 아니 아니... 그 차도 물에 잠길 수도 있었다. 따로 동시에 치바역 근처 호텔을 예약해 보려고 했지만 진짜 놀라운 속도로 모든 방이 팔렸다.


커다란 고속버스가 아니었으면 우린 절대 이 길을 오지 못했다. 5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 기사분이었는데 계속 회사랑 무선 연락을 하면서 침수된 정거장은 건너뛰고 임기응변을 발휘해 무사히 치바역까지 데려다주셨다. 분명 그분도 무서웠을 텐데. 너무 감사해서 내릴 때 덕분에 살았다고 깊이깊이 인사드렸다.

치바역은 정말이지 아수라장이었다.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는 줄이 길었고 불안한 눈으로 발을 멈추고 계속 전광판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그중에도 아주 조금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보였다. 일단 그들을 따라 뛰니까 10여 개의 노선 중에 딱 하나만 움직이고 있었다. 오! 하느님!! 도쿄로 가는 라인이었다!!

도쿄에서 일을 마치고 도심 외곽으로 향하는 사람들 발은 다 묶였지만 도쿄는 비가 심하지 않아 반대 방향은 오히려 한산하고 평온했다.
아.... 다행이다... 비록 쾌속 전철은 멈춰서 서른두 개 역을 가야 하지만 ㅋㅋㅋㅋ 거북이처럼 천천히라도 집을 향한다니 감사했다.
케군은 계속 어떤 상황인지 알려달라고 했다.
“도쿄 가는 게 있어!! 탔어!!” 기쁨의 이모티콘이 오가고 얘가 참... 걱정을 많이 했구나. 괜히 감동이 밀려오려고 하는 그 순간 케군에게 메시지가 왔다.
-그럼 나 이제 집에 가서 술 한 잔 할 수 있겠다~ 진짜 마신다? 응? 마신다?
와장창 ㅋㅋㅋㅋ 아~ 그게 중요했구나. 너는 ㅋㅋㅋ 한결같네 이 자식ㅋㅋㅋㅋ
아무튼 살아있으니까 다 괜찮아. 다행이다. 이거 타고 쭉 가기만 하면... 하고 한시름 놓은 줄 알았는데 옆에서 하루가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엄마.. 나 오줌매려...”
인생.... 쉽지 않네.
몇 정거장 가다가 후나바시 역에서 내렸다.
일단 화장실로 아이를 보내고 내 안의 모든 청력을 끌어모아 안내 방송에 집중했다. 술렁이는 역 소음 속에 한줄기 빛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15분 뒤에 도쿄역으로 가는 쾌속 열차가 운행을 시작합니다. ”
와 나 일본말 배우길 잘했다!!
나 일본말 알아들어서 다행이다!!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말이지만 진짜 그런 생각이 들더라 ㅋㅋㅋ 화장실에서 나온 하루 손을 잡고 쾌속 열차 플랫폼을 계단을 올랐다. 15분 후라니까 느긋하게 편의점에서 저녁밥도 샀다.

텅텅 빈 지정석 열차 칸은 물난리가 난 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유유하게 밥을 먹으며 도쿄역까지 왔다.

도쿄는 마치 다른 나라인 것처럼 아무 일 없는 일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온도차에 적응이 안 돼서 꿈을 꾼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가니 케군은 폭우가 내리는 치바 뉴스를 보며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 똑똑해진 아들이 다 커서 엄마 챙기며 편하게 즐기다 올 나들이였는데 갑자기 짐꾸러미랑 젖먹이 애 둘러업고 일사후퇴 다녀온 애미 심정이 돼서 돌아온 하루였다. 너덜너덜 대반전 ㅋㅋ
그러나 저러나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런데 자기 전에 생각도 못한 하루의 기분을 들었다. 하루는 처음으로 완벽하게 세운 여행 계획이 비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서 되게 실망했다고 한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러게... 진짜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말이야. 다음에 또 가자. 엄마가 이제야 위로를 하네. (진짜 몰랐지 뭐야.)
그래도
이게 여행이고...
이게 인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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