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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의 여름 휴가는 하와이였다. 호놀룰루가 너무 너무 환상적이었던 케군은 하와이를 부디 다시 가고 싶다고 노래를 했다. 그런 아빠에게 하루가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간 데 또 간다며 툴툴댔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이다. 나 대신 출동한 아들몬 든든하구만.
케군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하와이를 설득하다가 둘이 합의 본 내용이 호놀룰루가 아닌 하와이의 다른 섬, 빅 아일랜드로 가 보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다른 하와이일지 모른채 달라봤자겠지 하며 일단 목적지를 그곳으로 정했다.

볼케이노를 직접 볼 수 있다는 딱 한가지로 넘어간 하루와 하와이라면 다른 섬이든 어떠랴 신난 케군과 영어권이라면 갔던 데 또 가는 거 아니니까 장땡이었던 나.

하와이안 항공은 하네다에서 출발해 호놀룰루에서 내려 다시 국내선을 갈아타고 빅아일랜드 섬으로 1시간 환승하는 경로였다.

출발하기 전 배불리 돈카츠를 먹고 다이소에서 산 300엔짜리 선글라스를 자랑 중인 하루. 귀여워 뿌셔 ‘ㅂ’

원래 일본 사람들을 바로바로 나르던 도쿄- 빅알 사이의 직항이 코로나 이후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사실 코로나는 핑계였겠지. 이제 지갑을 여는데에 인색해진 일본 관광객을 하와이안 항공이 버렸다는 걸 일본인들도 흐릿하게 감지하고 있다. 슬픈 일본 경제의 몰락. 그래도 나한텐 일본인 관광객만 드글드글한 곳이 아닐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일본말만 듣고 사는 외국인은 일본말 안 들리는 외국에 가 보고 싶은 법이다.

이번 여행의 효자템,  바로 유니클로 츄리닝 바지였다. (라지 사이즈라는 게 중요 M과 L 핏 차이가 엄청 컸다)

기본적으로 캐주얼한테 무인양품 셔츠랑 입으면 살짝 슬랙스 느낌도 나는 오묘한 바지. 시티 여행이 아니라 자연을 만끽하는 여행을 떠나는 김에 지금까지의 여행 스타일과 달리 정말 가볍고 진짜 단촐한 시도를 많이 했다.
앞머리 고데기까지 막 챙기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 헤어 세팅기 일절 없고 심지어 화장품도 파우더 마스카라 쉐도우도 다 안 가져갔다.
운동화 하나 슬리퍼 하나 그리고 츄리닝 긴바지 하나, 청반바지 하나, 티셔츠 몇개, 진짜 여차하면 버리고 올 수도 있을 아주 오래 된 후드 잠바 하나.
10년 넘게 여름 휴가 때마다 챙기던 파란 리조트 원피스를 오래 고민했지만 그것 조차 두고 왔다. 원피스 한 장 없이 떠난 정말 헐렁한 여행 가방. 나는 아쉬운 게 있을지 아니면 충분했을지도 참 기대가 되었다.

여행 내내 얼굴이 타지만 않게 썬크림과 톤업 크림 하나 손으로 슥슥 바르고 눈썹도 안 그리고 아이라이너 한 줄씩 그리는 것으로 화장을 끝냈다. 근데 사진을 가까이 찍어도 썩 나쁘지 않아. 마흔 셋에 이정도면 뭐 나쁘지 않아. 도데체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쉐도우 브러쉬까지 바리바리 갖고 다녔는지 지난 시간들이 어이없을 정도였다. 처음이 어려울 뿐 모든 것은 익숙해지면 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밤 8시에 하네다를 출발해서 7시간 호놀룰루로 향한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저가 항공기의 조잡스러운 어메니티가 너무… 무용지물이라 대량의 쓰레기를 받는 기분이다. 이런 거 말고 그냥 먹을 걸 더 달라.

나보다 일본어도 잘하고 세상 물정 다 아는 열 살에게도 이런 걸 주셨다. 궁금하다… 키즈 상품은 몇 살까지 받게 될까. 수염나면 안 주실까? 너무 머리가 크면 승무원 분들도 줘야되나 고민하실까?

앞이 벽으로 된 좌석의 꽁꽁 숨겨진 모니터를 못 꺼내고 있었다. 하루랑 케군이 한참을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고 있을 때 내가  옆에 계신 중년의 여성분한테 (4명 좌석임) 영어로 물어봐서 알아냈다.
I’m wondering how to use the monitor at this seat. Do you know…?
(나 잘해쪄여?)
그리고 옆에 일자무식자들에게 내가 세상에서 얻은 정보를 전파해 줬다. 매우 환호한 왼쪽 백성들. 어마마마한테 감사해라.

모니터 질문을 계기로 옆의 여자분과 한참 영어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진짜 친절하고 좋은 분이었다. 일본에서 하와이로 이주한 할아버지 세대부터 뿌리내린 일본계 미국인이셨다. 일본에 있는 친척을 만나기도 하고 일본이 좋아서 자주 놀러 오신다고. 기내식으로 나온 로코모코를 먹으면서 이건 진짜가 아니라며 빅 아일랜드 힐로에 있는 로코모코 원조 (진짜 최초 집) 가게이름을 알려주셨다.
(호텔이 힐로와 완전 반대 쪽이라 가보진 못했음)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옆에 떨어져 앉은 언니 부부를 가르키며 언니 부부 아이들이 하나는 일본에서 공부 중이고 하나는 한국 연세대에서 유학 중이라며 엄청 좋아하셨다. 와우 정말 글로벌하다.

하와이에서 사는 건 어떤 느낌이냐, 반대로 내가 도쿄에서 지내는 건 어떤 느낌이냐 이런 이야기도 했고 나보고 한국에 자주 가냐고 해서 다음 달에 피부과 예약해서 한국에 갈 거라고 했더니 어쩐지 너 피부가 예사롭지 않다며 나이를 듣고는 너무 동안이라고 깜짝 놀라주셨다. 연기라 해도 개기쁘다. 개기름이 살며시 올라와서 그랬는지 개기쁘다.  선크림 + 톤업크림 조합 나쁘지 않아.

나도 무슨 일 하시냐고 여쭤봤다. 대학교 인사과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은퇴했다고 해서 엥? 은퇴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 아니에요? 하니까 이미 60이 넘으셨다.  속눈썹까지 곱게 붙이시고 풀메를 하셔서 너무 어려보였는데!!! 나야말로 그분의 동안 레벨에 진심으로 동공 지진이 왔다. 말도 안된다. 40대인 줄 알았다. 서로 그렇게 듣기 좋은 말을 나누며 그 짧은 시간에 엄청 친해졌다. 내가 기내에서 쳐바를 보습 제품 (트리든의 히알루론산 토너패드) 를 선물로 드렸더니 앙증맞고 동그란 팩은 처음 보시는지 신기하다고 너무너무 고마워했다.

이런 얘기를 막 떠들다가도 뜬금없이 나는 물었다.
Do you understand my English?
그 분이 너 잘해~ 다 알아듣겠어~ 빈 말이라도 너무 자신감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난 몰랐지.
이번 여행에서 내가 제일 길고 오랫동안 영어한 건 비행기 안에서 였다는 사실을.

아침 밥으로 두번째 기내식을 먹고 드디어 비행기에서 탈옥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예상하지 못한 것.
하와이안 싸구려 담요가 내 검정 셔츠에 엄청난 양의 먼지를 묻혀놓은 것이다. 완전 먼지가 날 색칠해 놓음…내리는 순간부터 참… 사람이 많이 없어보였다… 내가 아무리 이번 여행이 단촐하고 자유로운 영혼 컨셉으로 다닌다고는 했지만 이런 꼴은 아니였어.. 비행기 탈 때 까만 옷을 입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호놀룰루 공항에서 환승 전에 시켜 먹은 피자가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미쳐꾸리. 미국 = 피자 나의 공식은 또 한 번 굳어진다. 하지만 이때까진 또 몰랐지. 이번 여행에서 이게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난생 처음 환승하는 우리 아기 곰은 너무 신나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그러고보니 나도 환승이.. 처음이다? 외국에 사는 사람도 사람 나름이다. 일본 처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사는 사람이라 환승 같은 거 평생 해 본 적이 없었다.

참으로 깜찍한 국내선이었다.

하루가 자꾸 창문이 찢어져있다며 웃어서 표정 단속을 시켰다. 그러지마 비행기 놀리는 거 아니야. 어허.

빅 아일랜드 엘리슨 오니즈카 코나 공항에 도착했다. 너무 신기한게 공항의 대부분이 야외였다.

호놀룰루 공항의 정식 명칭도 다니엘 케이 이노우에 공항인 것처럼 여기 공항에도 일본인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일본인을 칭송한다는 것은 대대로 일본인이 이 지역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 그 말인즉슨, 일본인 관광객은 생각보다 많이 없었지만 어디를 가나 일본인 오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영어 안 해도 다 통하는 제길슨. 매우 신나네~

이번에는 렌트카를 빌렸다.
이거슨 새로운 경험이었다. 설렘.

생각보다 간단히 예약한 차를 받았는데 차일드 시트의 연령 제한이 딱 10살이어서 10살은 꼭 해야 하는지 10살부터 안 해도 되는지가 애매했다. 좋아! 영어를 꺼낼 타이밍이야!
우리 애가 열 살인데 여기 규칙은 어때? 물었더니..
음… depends on… case by…
이런 대답만 하셔서 이 동네도 상당히 헐렁한가 보다. 일단 빌렸다.

하와이에서 빌린 일본 차.
아직 미국에 왔다는 신선한 느낌 없음.ㅋㅋㅋㅋㅋ

렌트카로 여행하니까 정말 우리끼리 영어 안하고 시골 풍경 느끼며 아늑하게 돌아다녔다. 좋기도 하고 살짝 다이나믹함 없는 첫째 날이었다.

코나 지역의 아웃리거 코나 리조트 호텔.
40프로 세일할 때 예약해서 엄청난 득템이었다.
무취 무향 무벌레 무자극 넓고 너무너무 좋았다.

오션 뷰!

수영장 최고임!

여기서 딩가딩가 하루 종일 놀아도 질리지 않을 말 그대로 리조트 호텔. (대신 영어 안 해도 됨. 몇번을 말하지만 매우 아쉽군요)

옷 갈아입고 저녁 밥을 구하러 나왔다.

매점도 한 번 훑고

코나에서는 발에 채이듯 무지개를 보고.

형광 도마뱀.
너무 무해함.

차로 5분 거리의 슈퍼
오너가 일본인이라 살짝 일본 슈퍼 같음. 미국 너낌을 달라. 미국 느낌 많이 절실하던 그 순간에

왼쪽 운전대와 오른쪽 차선이 익숙하지 않은 케군이 좌회전 할 때마다 왼쪽 차선으로 들어가려고 해서 나랑 하루가 미기!!! 미기!!! 미기!!!! (오른쪽 !!! 오른쪽!! 오른쪽!!!) 비명을 질렀다.
좌회전 할 때마다 역주행 시도하는 우리집 가장 덕분에 미국 느낌 폭발함.
핸들을 포뮬러 레이싱급으로 꺽은 다음 오른쪽 차선에 안착한 케군이 겁나 머쓱하게 웃으면서 심장을 쓸었다. 우린 여행 내내 걸을 때도 케군이 왼쪽으로 가면 미기!!! 미기!!! 미기!!! 하며 놀렸다.

호텔에 돌아와 영화 필름으로 인화한 듯한 노을 뷰를 바라보며 저녁상을 차렸다. 이게 뭐야… 자연… 위대해… 우리 가족 너무 소중해…(뜬금포)

세련된 호놀룰루와는 다르게 시골 감이 있는 빅아일랜드 슈퍼에서 살 수 있는 음식은 한정적이었다. 오늘은  특별히 맛있는 건 없었지만 낼은 또 다르겠지.

아니.
그 다음 날도 별로 맛있는 음식은 만나지 못했다. ㅋㅋㅋㅋㅋㅋ빅 아일랜드에서 음식에 대한 기대는 딱히 하지 않을 것.

그나저나 거의 짐 없이 온 단촐한 나의 여행은 파자마까지 부피를 줄이려고 다 닳아빠진 쫄바지를 잠옷으로 챙겼다.

미기!!! 미기!! 미기!!! 이러는 꿈을 꾸면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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