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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하는 여자

언어별 인격

Dong히 2024. 3. 21. 21:46

나는 오랫동안 I의 삶을 살다가 20대 무렵 인싸가 되는 경험을 하고 E로 돌변한 케이스다. 어릴 적 국민학교 시절엔 여러모로 관리가 안된 모습이라 어른이고 아이고 어느 정도 나를 멀리하는 것도 당연했다. 부모님을 탓하는 마음은 전혀 없지만 맞벌이에 빈곤한 가정환경이었다. 잘 씻고 옷도 매일 갈아입는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차가운 물로 매일 머리를 감기 싫었고 (게다가 난 극지성 두피였다) 4학년부터 시작된 여드름에 옷은 늘 꼬질했다. 4학년 때였나? 앞에 나가 산수 문제를 풀라고 했는데 못 풀면 칠판을 잡고 뒤를 돌아 엉덩이에 방망이를 맞아야 했다. 원래는 세 대를 맞아야 하는데 선생님이 내 엉덩이를 내리치자 언제 빨았는지 모를 내 청바지에서 엄청난 먼지가 풀풀 날려 아이들 앞에 내가 당할 창피를 막아주고자 그랬는지 선생님도 그 상황이 더러웠는지 아무튼 그냥 한 대만 맞고 끝났던 기억이 난다. 나도 그땐 상당히 부끄러웠다. 아니 근데 나름 조용히 비슷비슷한 애들끼리 되게 재밌게 잘 지내서 우울한 시절은 아니었다.
 
점차 중고등학교 다니며 멋도 부려보고 알고보니 나는 피부는 더러워도 마르고 얼굴이 작아서 화장하면 예쁠 수도 있다는 친구들의 조언으로 (그리고 머리도 자주 감게 됨) 학교를 졸업하면 분명 새로워질 수 있을 거라는 어떤 믿음 같은 게 있었다. 어른이 되고 싶어 할 가장 보편적인 떡밥이 '대학 가면 여자 친구, 남자 친구 생긴다'와 '학교 졸업하면 당당히 술 마실 수 있다'였지만 나에겐 '당당히 화장하고 다닐 수 있다'였다. 몰래 언니 화장품을 훔쳐해 보기도 했지만 당당히라는 대목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 화장은 내게 새 생명을 주었고 그때 인생 최고의 다시없을 인싸가 되었다. 
 
직장을 다니던 난 아직 부모님께 돈을 받아 대학 생활을 하는 애들에겐 뭔가 있어보였는지 연애사가 끊이지 않았고 뭘 믿고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수많은 썸남들에게 갖은 허세를 다 부렸다. 아.. 생각하면 진피층까지 오글거리네. 뻥 좀 보태서 스카이 하늘 사랑 방에 내가 방만 만들면 팸으로 모여들었고 정모만 했다 하면 내가 오는지 안 오는지가 최대 관심거리였...  (내가 느낀 분위기는 그랬어... 음... 확실해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나는 점점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도 쫄지 않는  E가 되었다. 심지어 어느새 아이러브 스쿨로 모인 6학년 동창 모임 회장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 어땠는지는 인생에 그렇게 큰 영향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첫인상보다 마지막 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과거의 나는 상관없이 지금의 내가 =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그런데 일본에 오고 일본어를 하는 동안에는 새로운 인격이 쌓여갔다. 어릴 때 눈치껏 혼자있게 된 I가 아닌, 이도 저도 피곤해서 혼자 있기를 자청하는 I, 나보다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상황을 좀 더 살피게 되는 I가 생성되었다.  하루랑 이야기할 땐 한국어니까 E의 인격으로 이야기할 때가 많다. 그래서 하루가 길도 잘 물어보고 발표도 곧잘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일본 생활을 할 때 I의 삶의 모습이 많다. 우리 서로 돈 터치. 말 걸어서 쏘리.  문화가 나를 그렇게도 만들었고, 나이가 든 탓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슈퍼에서 하루랑 재잘재잘 한국말로 장을 보고 있다가 연유가 필요했다. 연유...연유는...과연 무슨 코너에 있을까. 먼저 빵 코너에 가 봤다. 꿀, 잼, 땅콩버터랑 같이 있을 거 같은 느낌. 근데 없었다. 참,  딸기에 뿌려먹지? 과일 코너에 가 봤다. 없었다. 얘는 유제품이니까...? 우유코너, 치즈코너, 요구르트 코너에도 없었다. 얘 포지션 뭐야... 하루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나가는 직원에게 스미마셍! 연유는 어디있어요? 물었고 
 
직원이 우릴 데려간 곳은 홍차와 커피 코너였다. 
니가 거기서 왜 나와....?
 
 한국은 연유가 무슨 코너에 있을까. 우리가 모르는 연유의 용도가 있나봐. 하루랑 생각지도 못했다며 깔깔대고 있는데 어떤 젊은 남자분이 직원 손에 이끌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리고 연유를 집어 들었다. 일본사람들도 예상 못한 건 마찬가지였네. 마음속으로 빵 터져서 
 
- 혹시 직원한테 연유 어딨는지 물어보셨어요? 우리도 지금 연유 물어봐서 찾았거든요. 연유가 이런 코너에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지 뭐예요?
재잘재잘 쏟아냈다. 
그러자, 남자는 쑥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 네. 저도 물어봐서 알았네요.
 
하며 순식간에 얼굴이 귀까지 빨개지셨다.
 
아..! 실수했다. 하루랑 한국말로 떠들다가  E처럼 말을 걸고 말았다. 나 때문에 귀가 빨개진 분을 보자마자 내 귀도 갑자기 빨개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괜한 말 해서 죄송해요"  최대한 위트있는 말투로 인사하고 내 얼굴색을 들키기 전에 하루랑 돌아섰다. 내가 빨개진 걸 보면 그분은 더 빨개지겠지? 나는 엄청나게 많은 I를 일본에서 만나면서 I가 전염된 거 같다. 급속도로 혈중 I 농도가 온몸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이유였구나.
 
참고로 영어 할 땐 천진난만한 E가 나온다.
아무래도 파워 E의 필리핀 튜터를 매일매일 만나기 때문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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