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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운전은 그야말로 정신이 쏙 빠졌다.
자꾸 선을 삐져나온다. 왼쪽으로 삡삐삐- 오른쪽으로 삡삐삐- 경고음이 멈추질 않아. 나에게 스피드 80킬로로 달리면서 핸들을 이래저래 움직이며 커브를 도는 건 담력훈련이다.
하루는 아빠가 운전할 때 분명 졸고 있었는데 엄마가 운전대를 잡자마자 눈이 번쩍 뜨여 온 감각이 예민해진 게 느껴졌다 생존본능 대박 ㅋㅋ 아무도 못 자고 있다.  우리 차 안의 아까까지 있던 그 여유로움은 다 꽁꽁 얼었다.
거의 모든 휴게소에 들러 운전을 교대했다. 케군한테 참 고마운 게 묵묵히 내게 운전 기회를 많이 줬다는 것이다. 또 주차에도 다시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날 포기하지 않았다. (오예) 이번 여행이 끝나갈 때쯤 살짝 주차 실력은 늘었다. 내가 후방 카메라에 너무 의존했던 것 같다. 그건 자동차 핸들 방향을 추정해서 나오는 그림일 뿐이라 실제와는 차이가 많았다. 역시 기술이 진보해도 사람 눈으로 사이드 미러를 보고 감각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많다.
차선을 밟으면 삡삐삐- 하고 경고음을 알려줄 뿐 내가 더 이상 차선을 밟지 않도록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감자 박물관 겸 휴게소.
앗- 이렇게 좋은 곳이 갑자기 나오면 곤란한데

여기서 밥 먹었으면 정말 좋았을 것을!!! 너무 계획에 없던 곳이라 화장실만 쓰고 떠나야 했다.

레스토랑 너무 예쁩니다.

홋카이도 내내 거의 이런 기온. 땀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래서 티셔츠 돌려 입기도 가능했던 미니멈 여행.

여기는 또다른 휴게소

하지만 체지방을 탈부착할 수 없는 케군은 가끔 홋카이도에서도 땀을 흘림. 케군이랑 하루 옷은 매일 갈아입을 수 있도록 날짜 수만큼 가져갔다.

지도상으론 3시간짜리 거리인데 휴게소를 다 들리고 밥도 먹고 5시간 가까이 달린 거 같다 ㅎㅎ

여긴 휴게소, 숙박, 레스토랑 시설까지 있네?

립 스테이크랑

피자를 시켰다. 대대대대 만족!!
북해도엔 경양식 (피자, 빵, 카레, 수프… 등등)이 많고 맛있기로 유명한데 일단 낙농업이 발달해서 우유, 치즈, 버터가 국내 제일이다. 그리고 밀가루를 많이 생산한다. 이러니 편의점보다 빵집이 더 많고 그걸 다 때려 넣은 피자가 어딜 가도 중박 이상은 친다는 거. 홋카이도에 가면 피자를 먹어보세요.

케군이 운전하는 동안 뒷좌석에서 차선 가운데를 달리는 요령을 찾아 열심히 동영상으로 공부했다.
여러 가지 방법 중 도로의 맨 끝을 멀리 응시 방법을 실행해 봤다.
지금까지는 차선이 앞차 유리 어디쯤 오면 그게 가운데라는 기준으로 운전했었다. 사이드미러를 볼 여유가 없고 머리는 바쁘고 심장은 펄떡대다가 신기하게도 저 멀리 지평선을 응시하자마자 마음의 평화도 찾아오고 차 안의 파도치듯 흔들거리던 움직임도 멈춘다.
사실 이거 알고는 있었다. 운전 강습 때 말투가 신선같이 인자하시던 아저씨 센세가 가르쳐 준 팁이었다. 그때도 난 오 멀리 보면 안정이 된다니 인생이랑 똑같네요 농담하고 그랬었는데 내심 그건 고수들이나 쓰는 방법이라 여기고 실제로 해 볼 엄두가 안 났었다.
그런데 오늘 인생 최초로 고속도로를 한 번에 30킬로씩 내 달리니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건 마치 매직아이 못 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가능해지는 초능력 비슷한 걸 얻은 기분이었다. 여전히 매직아이는 못 본다. 어릴 때 빡치던 생각이 나네. 텔레비전 정규방송 끝난 거 같은 그림을 보고 너도 나도 와! 보인다 우아! 우아! 이러는데 나는 죽어도 안 보였다. 뭔데?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아무리 물어봐도. 그냥 보인대. 그냥 하면 된대. 자기도 모른대. 단체로 나 따 시키는 줄 알았다. 가운데로 눈 모으면 된다던데 그 조차도 안 보였다. 내 친구들은 악의 1도 없이 그냥 그 테크닉이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앞 차가 있으면 좀 쉬운데 앞에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고속도로를 똑바로 달릴 땐 아주 멀리 바라봐야 한다는 테크닉을 얻어 기뻤다는 이야기.

엄마랑 아빠 사진 찍어줘

둘이 같이 나오는 사진은 샘난다고 제대로 안 찍어줌

드디어 212Km 달려서 노보리베츠에 도착.

노보리베츠의 관광지는 딱 2개밖에 없는데 하나는 곰 농장이고 하나는 온천이 솟는 ‘지고쿠다니’ 地獄谷 지옥의 계곡이다.

80도 온천이 땅에서 끓으니 자연스레 풀떼기는 없고 전설의 고향처럼 증기로 둘러 쌓여 자연의 위엄과 함께 기묘함이 풍긴다. 지옥의 계곡이라 불리는데 이의도 없었을 거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렸을 것임.

겨울에 가면 따뜻할까?

하루에게도 좋은 평을 받음.

자, 우린 곰 농장 투어는 스킵하고 호텔로 움직여봅니다.

호텔 입구에 차를 세우고 하루랑 내가 먼저 내렸다. 직원분이 오셔서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해주시고 다른 직원분이 케군이 주차하도록 유도하셨다.
그때 엄청나게 큰 폭음이 쾅!!!!! 하고 들렸다. 궁금함에 헏!!!!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려다가 직원분 눈치를 살짝 봤는데 나보다 더 빨리 소리 나는 쪽으로 호다닥 달려가심 ( 나 버리심 ㅋㅋㅋ) 같이 그냥 달려갔다.

영화 촬영인가? 이게 실환가?
길 건너편에 승합차 한 대가 옆으로 뒤집어져 있었다. 아직 인사도 안 건넨 직원분과
-저게 지금 무슨 상황이죠????
-차!!! 차가 뒤집어진 거죠???
-이… 이게 뭐래요?
-저.. 저… 저 커브 다 꺽지 못하고 뒤집어졌나 봐요!
-사람 괜찮나? 어떻게 차를 일으키죠?
-저건… 한번 가 보고 올게요.
주변 가게 사람들 동네 분들이 마구 몰려가는 걸 보고 직원분도 뛰어가셨다.

어떤 남자분이 신고 중

나는 입도 동공도 활짝 연 채로 그 자리에 붙었다. 어느새 옆에 온 케군이랑 하루도 내 설명을 듣고 똑같이 눈과 입을 열고 한참을 서 있었다. 곰 농장에서 관광을 마치고 내려오는 승합차 같았다.
왜 저 커브에서 뒤집혔을까. 스피드를 갑자기 줄였을까? 아니면 스피드를 아예 줄이지 않았을까? 핸들을 갑자기 꺾어서일까. 추측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얄팍하다…

호텔 체크인을 해 봅시다.
우리는 오래됐지만 규모가 작지 않고 깨끗하고 (저렴한 편이었다!!) 수준이 괜찮은 곳에 너무 잘 예약했다!! 와- 만세. 하코다테랑 노보리베츠는 하루가 고른 호텔이었기 때문에 우리 칭찬이 끊이지 않으니까 하루도 계속 기분이 좋았다. 이곳은 저녁밥, 아침밥 포함해서 1박에 (성인 2, 소인 1) 총 4만 8천엔. 타당한 가격인지 어떤지 여러분도 같이 둘러보세요.

쇼와 분위기 (80년대)가 살짝 나지만 온천 여관의 맛이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음.

지옥, 온천, 도깨비, 곰이 전부인 노보리베츠지만 몇 개 없는 특징을 잘 살린 일러스트들 ㅎㅎ

깔끔했던 우리 방. 청소 상태 굿! 냄새도 합격! (사진으론 알 수가 없어서 가끔 냄새나는 숙소를 만나면 절망적이다)

목욕을 하러 가 봅시다.
여기를 하루가 고른 이유가 있다.
온천 탕이 무려 31개가 있다. 이해가 안 되시죠?
좋은 홍보니까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가져와 봤습니다.

출처 まほろば 登別 Official site

그림은 지하 1층과 지하 2층의 온천탕 모습.
빨간 점들이 각각 하나의 온천탕들이다. 한 명씩 들어가는 작은 통도 아니고 목욕탕에 있는 그런 큼직한 탕들. 물론 지하 1층은 여탕/ 지하 2층은 남탕 이렇게 나누어져 있고 남탕 여탕 다 합쳐서 31개지만 그래도 여탕 한 곳에 워터파크도 아니고 15개!! 12시간씩 교대하기 때문에 1박 하는 동안 여자도 남자도 한 번씩은 모든 탕을 이용할 수 있다.
난 여기서 미끄럼틀 있는 온천탕을 처음 봤다. (온천 수영장 제외)

벌거벗고 온천탕에 풍덩.
하루는 아빠랑 남탕에 가서 밤에도 아침에도 풍덩풍덩풍덩 계속 탔다고 한다.

여탕에 혼자 가야 하는 나는 어떻게 했을까요
눈치를 스윽 보다가
어느 할머니께서 등을 돌리고 계시길래 침묵의 슬라이딩을 한번 해 봤다. ㅋㅋㅋㅋㅋㅋ 스스로가 너무 개그라 웃참. ㅋㅋㅋ 두 번은 못 탔다. (엄청…. 재밌긴 했음)

그리고 방에 돌아오니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 서른 명 정도가 동원된 구조가 시작되고 있었다. 트렁크 문을 열고 사람들이 나오고 들것에 실리는 것도 보였다.
(우리 방 창문을 열면 뙇 사고 현장 뷰였다. 영화보다 더 영화)
우리… 곰 농장 안 가길 잘했다.. 진짜 잘했다.

그날 저녁 지역방송에 보도됐다.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휴…) 근데… 마흔한 살 여성 운전자!!! 초등학생 포함한 여행객!! 왜 나이랑 성별이 같은 건데..
나는 이 날밤 곰 농장 갔다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차가 뒤집어지는 꿈을 다섯 번 꿨다. 내 차는 검은색 승합차였고 난 매번 죽었다.
나… 다시 운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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