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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동네는 횟집이었던 곳이 카페로 바뀌기도 하고 엄마랑 가던 순대국밥 집이 사라지기도 하고 고깃집이랑 보리밥 집이 그대로 있어서 재밌고 낯설었다. 카페에서 이모랑 언니를 기다리는데 나를 반가워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괜스레 걱정이 들었다. 카페에서 아줌마는 요새 탁구장에 매일 같이 출근하며 새로운 낙을 찾았다고 하셨다.
매일매일 영희 아줌마랑, 엄마랑 아줌마 이렇게 셋이 붙어 다녔는데 엄마는 고작 60에 뇌출혈로 그리고 2년 후에 영희 아줌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줌마는 세상에 신이 있다면 나한테 그럴 수는 없다며 내 친구 둘을 그렇게 한꺼번에 데려가는 게 어딨 냐고 하셨다. 영희 아줌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온 여행이 일본이었다. 아줌마가 일본에는 왔는데 멀리 온천에 와서 날 보러 갈 수 없다고 미안해~ 하며 연락하셨다. 그래서 재밌게 놀고 있어요? 하고 물으니 다른 사람들은 관광 가고 영희가 너무 아파해서 아줌마는 방에 같이 있어~ 하며 옆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때도 슬펐는데 얼마 전에 <은중과 상연> 드라마를 보다가 아줌마랑 영희 아줌마 생각이 나서 정말 많이 울었다. 영희 아줌마를 잃으시고 한 동안 아줌마는 우울해서 힘들어하셨다. 요즘 밥만 먹으면 탁구 치러 갔다가 언니들이 싸 온 간식들 같이 먹고 끝나면 맥주 한 잔 하신다는 아줌마가 너무 잘됐다. 명절에는 좀 심심하겠어요. 탁구장도 그런 날은 문 닫겠지 하고 물었더니 아줌마가
"그런 명절에 더 많이 모여. 다 식구들 지긋지긋해서 탁구장으로 탈출해~" 빵 -터졌다. 무슨 탁구장이 연중무휴라고...


멀리서 10년 만에 언니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 걱정과는 달리 언니는 날 안아주면서 감격해했다. 하루는 안 왔냐면서 꽤 이모같은 말도 했다. 언니는 8월에 긴팔 니트를 입고 있었다. 왜야..? 뭐야.. 이거? 하니까 언니가 "나는 반팔을 싫어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좋아서 입는 건 아니지 않나요. ㅋㅋㅋㅋㅋ 빵 터져서 대놓고 웃었더니 서로를 비웃고 주접떨다 선 넘으면 깨지는 어릴 때 그 바이브가 살았다.
이렇게 언니는 어려운 사람이다. 어렸을 땐 그냥 예민보스라고만 생각했었다. 세상 언니들은 다 저렇게 지x인가…. 언니 있는 친구들이랑 결론을 냈었다. 그런게 아니었다. 언니의 감각으로 세상을 사는 건 하나 하나 다 힘들고 거북한 것 투성이일텐데 그 속을 열심히 사는 언니가 너무 기특했다. 니트 입고라도 밖에 나가서 돈을 벌고 사는 게 어디야..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모랑 언니랑 아줌마랑 다 같이 회계사 사무실로 찾아가 오전 중에 서류 작업을 다 끝냈다. 방금 동사무소 가서 신분증을 내밀었을 뿐인데 갑자기 모든 유산 상속과 소유 이전까지 마친 코리아 스피드에 살 떨리는 쾌감을 느꼈다. 진짜 대박이다...
지난밤에 아줌마에게 물었다. 혹시 괜찮으면 내 몫으로 생긴 돈이 있다면 언니한테 다 줘도 될까요. 아줌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누웠던 몸을 벌떡 일으켜 앉으며 절절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래 줄래? 동히야. 아이고야... 어쩜 그런 생각을 다 했냐. 아줌마가 너무 고맙다... 너희 언니가... 여태 그 전 남편이 진 빚.. 그거 혼자 갚고 있다더라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태 그 빚을 혼자 갚고 있었다고? 처음부터 쎄하더라니 도망치듯 이혼한 언니는 빚을 떠안았다고 한다.
자기 발등 자기가 찍은거고 미워도 못나도 나는 내 형제를 감싸는 거니까 그렇다치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줌마는 그런 언니를 답답해하지도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손절도 안하고 그저 가여워서 동동하신다.. 내가 돈 주고 싶다니까 그것까지 고마워하신다. 나는 언니가 결혼생활 하는 동안 하도 하는 짓이 이해가 안되서 잠시 손절했었다. (엄마 미안해..) 엄마는 엄마 대신에 아줌마를 주고 갔나 봐... 엄마도 보고 싶지만 아줌마가 언니한테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이번에 땅을 아줌마 이름으로 돌리고 아줌마가 언니한테 땅값을 쳐서 돈을 주셨다. 그걸로 드디어 언니는 오랫동안 옭아매여 있던 빚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다.
셋째 이모가 저기서 걸어온다. 제일 엄마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증명사진 같이 쓰기도 쌉가능이다. 오랜만에 만난 이모랑도 진짜 수다를 많이 떨었다.
이모 : 야야.. 그거 뭐야... 영어 이름인데 치매 아니고...
나: 파킨슨!
이모: 어 맞다 그거야.
이모: 그거 뭐지? 입술에 막 이렇게 이렇게 나가지고 사람 죽기도 하고 그런 거 있잖아. 엄마도 엄청 많이 걸려가지고
나: 대상포진!
이모: 어 맞다 그거야.
나: 이모! 다음 퀴즈 내 봐!
무슨 얘기가 절반은 이모의 퀴즈였다.
명사랑 대명사를 빼고 서술하시오.
나의 활약에 언니가 배를 잡고 웃었다.

이모한테 이제 와서 묻기 뭐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많이 물었다. 예를 들면, 이모들 본명... 같은 거..? 이름 세 글자도 제대로 모르고 맨날 마포 이모~ 하남 이모~ 이런 식으로 불렀다. 엄마는 아홉 형제 중 8번째 딸이었다. 그래서 첫째 마포 이모는 엄마랑 한참 차이가 났다. 올해에 90세가 되셨다니까 엄마랑은 18살 차이시다. 와... 마포 이모의 풀네임을 그날 처음 알았다. (어이없네)
이모: 마포 이모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집에 승연이 오빠가 있잖아.
나: 아 맞어. 승연이 오빠!! 이모네 첫째 아들. 공부 잘하는 오빠잖아요.
이모: 그래. 승연이 오빠가 공부를 엄청 잘했잖아.
나: 고대인가? 연대 가지 않았어요?
이모: 연세대 나와가지고 국회의사당에서 일했어 지금은 은퇴했지.
어...? 언니랑 나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모가 90세니까 승연이 오빠가 은퇴를 해도 이상하진 않는데 어렸을 때 엄마랑 마포에 가서 대학생 오빠 책상을 보며 구경했던 그날의 우리 둘에겐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 우리가 이제 마흔 중반인 건 생각도 안 하고 하여튼 너무 이상했다.
나: 뭐야... 그 집만 시간이 배로 가는 거 아니야..?
언니: ㅋㅋㅋㅋㅋㅋㅋ
나: 언니도 마흔이 넘었어. 어우 징그러.
언니: 뭐래. 너나~ㅋㅋㅋㅋㅋ
나: 그래서요 이모. 승연이 오빠 잘 지내요?
이모: 승연이 오빠가 색시도 (그 색시도 이제 60이실 텐데 ㅋㅋ 네네) 엄청 똑똑한 애랑 결혼해서 둘이 아들을 낳았거든. 걔가 이번에 대학에 갔어.
나: 와!!! 승연이 오빠네 아들이 대학생이라니..
이모: 근데 원래 아버지 모교인 연세대에 가고 싶어 했는데 연세대도 붙고 카이스트 전액 장학생도 붙고 서울대도 붙은 거야.
나: 대--박!! 우리 집안에 그런 수재가 있다니!!!
이모: 지금 서울대 갔어.
나: 아니 어떻게 키웠길래 서울대를 보냈대요?
이모: 그래서 다들 너무 신기해서 승연이 색시한테 (이 호칭 너무 웃김 ㅋㅋ) 다들 물어봤어. 뭐 시키는 거 있냐고. 그랬더니 아니에요~ 저는 아무것도 안 시켜요~ 하더라고.
나: 역시... 절대 비법은 가르쳐주지 않는구나?
이모: 근데 예전에 마포 이모가 다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승연이도 색시도 다 바쁘니까 내가 병간호를 해 줬거든. 그랬더니 승연이가 이모 고맙습니다 하고 리조트 숙박권을 선물로 준거야. 승연이 아들이 초등학생 때였는데 이모할머니 저도 데려가 주세요~ 네? 저 데려가주세요~~ 하면서 사정을 해. 나는 걔 어릴 때 뭐 돌봐 준 적도 없고 그렇게 말해본 적도 없었어. 그래서 야야... 너 왜 이모할머니랑 리조트 가고 싶냐...? 물었더니 걔가. "그럼 텔레비전 볼 수 있잖아요..." 이러더라고.
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ㅋㅋㅋㅋㅋㅋㅋ 인터넷 핸드폰 이런 수준이 아니라 아예 집에서 티비를 못 보는구나.
이모: 맞아. 집에 아예 테레비를 없앴었어.
나: 와... 최고의 도파민이 티비라니...
승연오빠 아들 이야기를 듣고 알아버렸다.
공부는 세상에 널린 도파민 유혹과의 싸움이라는 것.
나: 이모네 손녀딸도 이제 대학생 아니에요?
이모: 그래 야~ 걔도 웃겨~ 우리 사위 코가 좀 코주부잖아. 감자처럼 이렇게~
나: 아~ 형부 네네. 기억나요.
이모: 우리 손녀딸이 아빠를 닮아서 어릴 때부터 코 수술해 달라고 그렇게 졸랐어. 그랬더니 사위가 대학을 인서울 하면 아빠가 코 수술 시켜줄게 했더니... 걔가 미친 듯이 공부해서 국민대를 갔다.
나: 와!!!!!!! 수술도 해줬어요?
이모: 응~ 이쁘게 해서 지금 엄청 신나게 대학교 댕겨.
잘했다 ㅋㅋㅋㅋ 진짜 장하다.
공부는 동기부여만 되면 끝나는 게임이구나.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밥풀 튀기며 웃고
언니는 알바 가고 이모는 집으로 가고
아줌마는 탁구장에 가고
나는 홍이를 만나러 지하철역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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