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틀 칭칭 감은 지혈 밴드는 정말 방망이만 하게 컸다. 누가 봐도 존재감이 뿜뿜이었다. 다친 다음 날 당장 대신해 줄 사람이 없어서 두 시간만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주문받고 음식 나르고 커피를 내려놓고 그 방망이가 많은 손님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한국에서라면 처음 간 식당이라도 누가 칭칭 감고 일하고 있으면 “어머~ 아프시겠다~” “에구 다치셨나 봐요.” 지나가는 말을 할 거 같은데….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스무 명에 한 명이라도?
그날 일하는 동안 아무도 내 손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서른 명 넘는 손님이 단체로 이게 안 보이는 걸까? 그렇지.. 뭐 도쿄 사람들 특기지. 머리론 알고 있었다.
근데 어느 시점에서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단골손님이 왔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보고 하는 한 마디를 기대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보는 사람이고 내가 날씨이야기를 하면 받아주고 오랜만에 나오면 "애 방학이 끝났나 봐요?" 그러셨는데... 아무 말도 안 하신다. 이게 안 보이려야 안 보일 수가 없는데.
주방에 들어가서 나카하라상에게 호소했다.
(나카하라상 DATA : 주부, 10살 언니, 아이 둘 모두 성인, 전직 교사, 내 추측 100% T 재질)
-나카하라상! 아무도 이 손가락에 대해 말을 안 해요. 안 보이는 거 아니죠?
-말 안 하죠. 아무도 안 할 걸요. 절대 안 하죠. 하면 지는 거예요.
(컥컥컥컥 웃음이 터졌다.)
심판 누가 보는 건데.
대체 무슨 게임이었는데.
마지막은 농담이셨지만 사회의 불문율이다란 뜻으로 하신 말이었다.
재일교포 친구 두 명을 만나서 이 일을 얘기해 줬다.
그렇게 눈에 띄는 손가락을 하고도 수십 명이 보이는 척도 안 했다는 이야기.
그러자 반대로 교포 친구들이 물었다.
-언니 한국에서는 단골도 아닌데 처음 보는 점원하고 그런 얘기해도 돼요?
-그렇지. 아프시겠다~ 이런 얘기할 수 있지.
오히려 놀랬다.
교포 친구들은 애 키우면서 철저하게 교육시키는 것 중에 하나가 보통사람과 다른 용모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변이 나타나면 ’ 쳐다보지 마..!!! 이쪽 봐..!! 눈길 주지 마!!! 모른 척 해!!!‘ 속삭이며 훈련시킨다고 한다.
도쿄에서 종종 보는 치마를 입은 아저씨나 양갈래로 땋고 핑크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할머니, 기괴한 화장을 한 사람들을 보면 아이들은 솔직해서 바로 시선을 못 박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강도 높은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도쿄 사람들의 그런 면모가 존경스러울 때도 많았다. 틱 장애가 있어도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안 보이는 척해 주니까 그런 분들이 밖에 나오기가 편하지 않았을까.
-아니 근데 손가락 다친 건 엄청 큰 사연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이야기 나눌 수 있잖아.
-뭐라고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아…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스몰 토크를 건네야 할지 모르는구나.
-그리고 내 작은 한마디에 사실은 크게 상처받고 막 고민하다 극단적 선택 같은 거 하면 어떡해요.
-야… 야…. 뭐 그런 키키키
아니 누가 그런 상상을 하면서 사냐며 웃다가 전부 농담은 아닐 거란 분위기에 서늘해졌다. 진짜로 그런 상상에까지 미친다고?
남편이랑 아이를 데리고 겨울철 한국에 갔을 때였다. 아이는 감각이 예민해서 목에 뭘 두르면 짜증을 냈다. 목이 조이는 셔츠, 목 폴라, 후드 티도 싫어했다. 그래서 영하의 서울을 목도리 없이 돌아다녔더니 만나는 아주머니마다
아주머니 : 아이고 애 목에 뭘 좀 둘러줘야겠다.
케군 : 知り合い?(아는 사람이야?)
나: 아니.
두 번째 아주머니 : 목도리 없어? 휑 하네~
케군: 아는 사람이야?
나: 아니.
세 번째 아주머니 : 목이 따뜻해야 감기 안 걸리는데~
케군: 아는 사람이야?
나: 아니.
그놈의 목도리 돌림노래를 한참 했다. 그땐 생면부지끼리 대화 주고받는 문화에 혀를 내둘렀었다. 와… 가끔 오면 좋은데 맨날 여기서 애 키우는 사람들 존경스럽다며.
그러던 내가 이제 어이없게도 아무도 말을 안 걸어줘서 삐져있다.
교포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이 문화가 어느 쪽이 우월하냐 옳으냐가 아니라 느낀 그대로 내 마음을 흘렸다.
-그냥 나는… 寂しかったの。 (외롭더라고..)
-아…
작은 오지랖이 독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반론하던 교포 친구들이 갑자기 말을 잃었다.
-그게 언니를 외롭게 했구나...
친분이 없는 사람끼리 절대 대화하지 않는 도쿄의 룰이 사람을 외롭게 할 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나도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긋지긋할 땐 언제고 없으니까 허전하고 쓸쓸하다니. 그리고 도쿄에서 자란 친구들은 그게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는 것도 놀라웠다. 줬다 뺐으니까 아쉬운 거지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으면 그게 아쉽지도 않은가 보다.
그 다음날 영어 회화 수업에 갔더니 호주 출신 사이먼 선생님이 “오~ 손가락 왜 그랬어요~” 하고 물었다. 마음에 모닥불 하나가 지펴지며 순식간에 따스해졌다. 타인에게 삭막하리만큼 선을 긋는 도쿄에서 남은 평생을 나도 그렇게 따라야겠지… 서글퍼지던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그래, 도쿄에 사는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나는 작은 오지랖으로 모닥불을 켜 줘야겠다.
우리가 느꼈다가 빼앗긴 그 따스함을 우리끼리 주고받는 것도 괜찮겠다.
도쿄에 사는 외국인 분들 사람들이 사적인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말아요.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대요.
'대화 하는 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국인이 잘 못 알아들을 때 (14) | 2025.02.11 |
---|---|
화장실 옆 칸에서 (6) | 2025.02.07 |
손가락 다친 이야기 후편 (9) | 2025.01.15 |
손가락 다친 이야기 전편 (10) | 2025.01.08 |
2024년 어머님과 작별 (24) | 2025.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