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편의점에서 꽁꽁 언 아쿠아리어스 (포카리 맛)을 사서 버스에 오른 날.
해가 너무 뜨거웠고 내 마음은 지금이라도 넘칠 듯한 냄비처럼 울그락 푸르락했다. 그러고 보니 몸을 너무 안 움직였다.

일부러 근처에서 내려 걸었다. 얼마나 심신이 평온하지 않았냐면 두 달 전에 알바하다 목격한 장면까지 뇌리에서 꺼내 혼자 화를 낼 정도였다.
6월 어느 날이었다. 엄마, 아빠, 한 세살쯤 돼 보이는 아기가 스파게티를 먹으러 왔다. 푹신한 소파 석에 자리를 안내하고 주문을 받으러 갔다. 아기는 아직 먹는 양이 많지 않은지 엄마랑 아빠 스파게티를 조금씩 나눠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엄마는 매운 스파게티를 먹고 싶었지만 아이를 생각해서 참고 적당한 알리오 올리오 맛을 골랐다. 아빠는 지가 먹고 싶은 걸 그냥 골랐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스 레몬티, 아빠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아기가 애플주스!! 사과!! 사과!!! 를 외쳤고 "그럼 사과 주스도 하나 주세요" 주문을 했다. 나는 너무 죄송한 마음을 한껏 표현하며 "점심메뉴 세트는 스파게티 하나에 음료수 하나를 80엔에 드실 수 있는데 스파게티 2개에 음료를 3개 하실 경우, 한 잔은 세트 가격이 아닌 단품 가격으로 400엔이 되거든요.. 어떡할까요?" 두 어른은 실망감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아... 어떡하지... 하는데. 엄마의 어떡하지는 아빠를 떠 보는 어떡하지였고. 아빠는 진짜 어떡해야 할 지모르는 어떡하지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짜 모른다는 게 나는 순간 빡이쳤다. 엄마는 뜸을 들이며 아빠에게 '제발 눈치채라'라고 시간을 줬다. 같은 시간 내 마음도 똑같이 '제발 눈치채 줄래요 손님??'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아빠는 끝내 정답을 못 찾았다.
엄마는 체념한듯 인상을 쓰며 "하아... 아이스 레몬티 취소하고 애플주스로 바꿔주세요." 엄마는 자기 음료를 포기하고 아이에게 양보했다. 아빠는 끝까지 '아 ~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이런 얼굴로 이 상황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착각했다. 엄마가 작게 쯪.. 혀를 차는 소리를 들었다. 내 속은 열불이 터졌다.
엄마는 계속 아이가 흘리는 스파게티를 줍고 아이 입에 음식을 넣느라 바빠 보였다. 건너편에 앉은 아빠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아이스 커피를 쪽쪽 빠는 모습이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 걸어 요리사 아저씨 얼굴의 '갑빠바시' 입구까지 도착했다.

원래는 일본 식기, 장인들이 만드는 식칼, 그리고 아기자기한 식품 샘플 열쇠고리를 사러 오는 외국인 관광객으로 넘치는 거리였는데 이렇게나 조용해졌다.




베이킹 도구 전문점인가보다


과자 틀이... 철창 같아서... 무섭다..?

롯데월드 캐릭터 아니야?

죄수 번호 같아 무섭... 다?


양식에도 어울릴 것 같은 식기가 많았다. 이 집 추천이요.


좋아하는 물건들을 보고 나니까 기분이 좋다. 단순한 것에 감사해야지.


300엔에 밥그릇 두 개를 사 왔다.
다른 그릇은 안 샀다.
우리 집엔 좋은 그릇들이 이미 많이 있었다.
만 오천보를 걸었다.
기분이 길게 뻗어 올라갔다.
아이스커피 아빠가 다시 떠오른다.
엄마는 아이스커피는 다른 데서 먹고 사과 주스 시켜도 돼?라고 물어도 되지 않았을까. 야박하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게 싫을 수도 있지만 속이 시커멓게 썩는 거보다 좀 못되지는게 나을 거 같다. 아빠는 그 말을 들었어도 '아~ 그런 방법이 있구나!' 했을 수도 있다. 얼굴은 잊었지만 그 엄마 속이 지금쯤 시커멓게 썩지 않고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케군한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봐야겠다.
'도쿄와 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마고메역 駒込 ] 미시마야 三島屋 정식집 (8) | 2022.01.14 |
---|---|
[쿠라마에] 카페 from afar : 글씨는 예쁘게 써야 할까요? (10) | 2021.11.19 |
[키치죠지]四歩(십뽀)/하티프넛 카페 (8) | 2021.09.22 |
[오기쿠보] 쇼앙분코 松安文庫 (12) | 2021.09.03 |
[긴자] Varmen프렌치 런치 / Cova이탈리안 초콜렛 (10) | 2021.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