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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생활 15년 만에 드디어 와 봤다. 시세이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시세이도 파라!
간판을 자세히 보고 느낀 첫 충격. 다들 시세이도 파라 파라 하길래 파라다이스를 줄여 말한 줄 알았는데 Parlour 팔러! 응접실, 접객실이란 단어였다.

시세이도란 이름의 매장에 화장품이 없다는 것이 새삼 신기.

익숙한 발걸음으로 입장하는 중년부부 뒤를 따라 두리번두리번 따라 들어가는 나는 영락없는 시골쥐다.

매장 깊숙한 곳에 레스토랑으로 이어진 엘리베이터가 있구나. 위층으로 이어진 수단에 불과한 것까지 비밀스럽고 특별해 보인다.
또 팥죽색이 이렇게 고급스럽운 색이었구나.

대기 의자 뒤에 있는 오묘한 팥죽색 그림이 오로라를 방불케 해서 기분을 고양시켰다. 시…시세이도 파라에 왔어..

메구상이랑 밖에서 외식을 하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한국어 수업을 재개하고 자주 만나지만 갑자기 시작된 메구상 집 정리 프로젝트로 몇 달을 주야장천 집으로 찾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이 깨끗해진 얼마 후 이런 말을 들었다.

-센세 나 대장암일 수도 있대. 조직검사를 하기로 했어.
나는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다. ‘자궁암일지도 모른대‘라는 카나짱의 폭탄선언에 나도 모르게 연습된 것이었다. 부모님도 계시고 남편, 형제 다 있는 카나짱 이야기를 들었을 땐 너무 놀라 사고가 정지됐었는데 부모님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살고 있는 메구상의 말엔 정신이 번쩍 들며 반대로 빠르게 침착해졌다.
-검사가 언제예요? 통증이 있어요? 너무 아프면 바로 입원해요. 내가 짐 챙겨서 병원으로 갈테니까.
온 집안을 다 뒤집어 메구상이 성인식 때 입었던 기모노가 어디 있는지까지 속속들이 알게 된 나는 그녀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고 나밖에 없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 정리가 다 되어 갈 때쯤 메구상도 잊고 있던 물건을 내가 뚝딱 찾아내니까 “이제 치매 걸려도 걱정 없겠어요. ”농담을 하던 메구상의 말이 떠올랐다. 둘이 한참 웃은 다음 그 농담의 끝이 진담으로 바뀌어있단 걸 알았다. 진지한 얼굴로 “맞아요. 진짜 그래요.” 하고 눈빛을 교환했었다.

밤 크림이 국수처럼 내려온 몽블랑 파르페를 먹어? 비주얼이… 비주얼이… 아.. 나 밤이랑 고구마는 밤과 고구마일 때만 좋아하지 참. 그걸로 밤 크림이나 고구마 케이크로 만들면 싫더라. 예전부터 바나나는 좋아하지만 바나나킥에는 전혀 손이 안 간다던지 딸기는 좋아하지만 딸기 맛 아이스크림이 맛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천정에도 팥죽색이 섞인 붓터치와

미묘히 톤이 다른 팥죽색 벽면이 굉장히 비현실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한 유니폼의 메이드들이 고상함 그 자체여서 누구보다 지체 높아 보이는 것이 제일 환상적이게 느껴졌다.

먼저 티에 넣을 설탕, 물 등을 옮겨주시고 포트의 티를 컵에 당연한 몸짓으로 따라주시는데
-와… 전 이런 데서 알바 못할 거 같애요. 너무 고급스러워서 벌벌 떨다가 차를 줄줄 다 흘릴 거 같아요.
했더니 직원분이 크게 미소 지으시며
-아니에요! 절대로 잘하실 거예요!
하셨다. 메구상이 지금 스카우트당한 거라며 이력서 넣어보랜다. 그리고 덧붙여 유니폼이 왜 이렇게 주름 하나 없나요. 매일 다림질하나요? 하찮고도 희한한 질문을 했다. 매일 회사에서 다림질까지 된 옷이 오니까 입기만 하면 된다고 직원들이 그런 수고는 안 한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헤드헌팅 수준이 너무 훌륭해서 메구상과 빵 터졌다.

메구상은 살짝 다른 타입의 몽블랑 파르페를 시켰고

난 항아리에 치즈케이크가 들어있는 플레이트 디저트를 시켰다.

 

-정밀 검사는 어땠어요?
메구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최악이었다는 얼굴을 했다.
-왜요? 왜요? 뭔데요. 뭔데요.
닭꼬치 캐물으니 글쎄, 세상 잘 생긴 검사원이 내 대장 검사를 했다며 하필 왜 대장암 검사고 하필 왜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냐고 지지리 운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까지 잘생길 필요가 있냐고요" 하는 말에 자지러지게 웃었다. 누구같이 잘생겼냐고 대보라고 닭꼬치 캐물으니 미생의 임시완 스타일이랜다. 너무 메구상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ㅋㅋㅋㅋㅋㅋ

이색 체험일 만큼 좋은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던 시세이도 파라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남기고

긴자 식스 안에 있는 츠타야에 구경 갔다.

갤러리 공간이 있어서 한참 놀게 되는 서점

그리고 메구상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양성이어서 작은 플립을 떼는 시술만 받으면 된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카나짱에게도 연락이 왔다!

양성이래!! 암 아니래!!! 근데 자궁근종이 너무 커서 그건 수술을 해야 한대. 암이 아니라고 말해줘서 일단 너무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순간 양성 글자가 다시 보니 陽性 이쪽이라 이건 나쁜 거 아니던가? 놀라 다시 물었다. 음성이 네거티브고 양성이 나쁜 소식 아니었어? 음성을 잘 못 쓴 거지? 하니. 아! 良性 이 양성이던가??? 바이러스는 양성/음성이라고 표시하지만 암은 양성/ 악성으로 표시한대.라고 가르쳐줬다. 아아!! 그런 것도 같네. 아우!! 코로나로 양성이란 말만 들으며 유감을 겪는 버릇이 생겼다. 휴... 양성이래.. 둘 다... 아무도 모르게 한 동안 내 마음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하고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만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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