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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복판에 광활한 자연과 정적인 자태의 도쿄 대학교는 우리 동네 최고의 산책로였다. 하루가 어릴 때 윰차를 끌고 아무 때나 학교 안에 들어와 낙엽 놀이도 하고 학교 축제도 즐기고 했는데 코로나로 그 문이 닫혀버렸다. 아니 원래 정문으로 유명한 ‘아까몽’ 빨간 문이라는 뜻의 대문은 너무 낡아서 원래 열리지 않지만 다른 많은 샛문들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가 코로나로 출입이 금지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카나짱을 만나 밥을 먹는데 올해부터 열렸어. 몰랐어!!?? 반년이 지나도록 열린 줄 모르고 그 주변을 다닌 사실을 알았다.

몇 년 만에 들어 간 도쿄 대학 캠퍼스는 시간이 멈춘 듯 다른 세상 속인 듯 숨 막히는 신비감이 감돌았다.
항상 아이랑만 오다가 혼자 오니까 비로소 고요하고 웅장한 모습이 느껴졌나 보다. 초등학생이 된 아이는 지금도 함께 있으면 내 정신의 반을 가져가고 있는데 어릴 땐 어련했겠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커피 한 잔, 디저트 하나를 사서 나왔다. 대학 안에는 편의점, 프렌치 레스토랑, 학생 식당, 도토루 커피숍, 스타벅스도 있다는 사실.

여기저기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겨도 아무도 미심쩍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애 엄마도 할머니도 아저씨도 누가 봐도 대학생일 것 같지 않은 연령의 사람들이 드나들고 아니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여기 학생이며 교수며 직원들이기도 하니까. 내가 졸업한 치바의 대학도 넓은 자연 속에서 계절마다 피는 다른 꽃들을 구경할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승마부가 말을 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까몽 정문 (빨간 대문)

어느 날은 분수대 옆에 꼬리로 엄청 유혹하는 강아지를 만났다. 너무 귀여워서 나도 발길을 멈추었더니 더 반가워서 빨리 여기로 오라는 듯 강아지 꼬리는 박차를 가했다. 맙소사, 저러다 나 때문에 꼬리가 짤려 날아가 버리는 거 아니야.
주인의 얼굴을 살피며 조용히 말을 걸어 보았다.
-너무 귀엽네요… ㅠㅠㅠㅠ
다행히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미소를 지으며 아주머니께서 웃어 보이셨다. 먼저 만져도 된다고 말씀해 주셔서 냉큼 다가가서 우쭈쭈쭈를 시행했다. 핡핡 털복숭댕댕 귀여워 주금…
루이와 (강아지 이름 접수) 아주머니는 매일 도쿄 대학을 산책하신다고 했다.
-편의점이 100엔 로손도 있고 저기 밑에 그냥 로손도 있어요.
-오! 그렇구나. 그럼 로손에서 뭐 좀 사서 저기 분수대에서 먹어도 괜찮겠어요.
-근데 저쪽 까마귀는 괜찮은데 분수대 나와바리 까마귀들은 성질이 드세서 음식에 돌진해 올지도 몰라요.
-어먹. 꿀 정보 감사합니다.
어디 사세요. 자주 오세요. 우리 아들이 7살인데 여기 영어 수업이 있어서 맡기고 늘 한 시간씩 산책하고 있어요. 이런 말도 나왔고 나는 한국인이고 이런 말도 나왔다. 그랬더니,
-한국 분이시구나!!!!!! 우리 딸 남자 친구가 한국사람이에요!
-어먹. 웬일이래요!!!! 진짜요?? 어디서 만났대요?
-무슨 언어 교환하는 어플에서 만났다더라고요.
- 따님이 한국말할 줄 안다니 너무 신기하네요.
-네네. 한국 좋아해요. 남편분은 일본인이에요?
-네. 저희도 국제결혼인데 전 너무너무 추천해요. 서로 문화가 다르다는 걸 알고 만나는 거니까 먼저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전제돼 있잖아요. 대화를 많이 하게 되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문화 차이가 아니라 그냥 성격차이었던 거 되게 많거든요… 일본인치고.. 그때 그거.. 이 자식..좀 이상했네?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당시에는 문화가 다르니까 그런 거겠지 하고 너는 어떤 느낌으로 이렇게 했어? 나는 이런 느낌인데? 이렇게 서로의 감각을 설명하고 이해하고 그래서 더 같은 나라 사람보다 잘 지낸 거 같아요.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네요. 그리고 우리 딸 남자 친구 보니까 사랑 표현도 너무 잘해주고 한국사람이 확실히 스윗한 거 같애요!
-아. 그건 맞아요! 한국 남자들이 진짜 자상하고 잘해줘요!
-그렇구나!!
-근데 결혼하면 똑같아요!!
-그렇구나!! ㅋㅋㅋㅋㅋㅋ
-그냥 남편이 돼요!!!
-그렇군요 ㅋㅋㅋㅋㅋㅋㅋ
-아… 뭐 장단점이 있습니다. 엄청 자상했다가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면 실망감이 크잖아요. 막 그렇게 자상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혼 전이나 후나 한결같으니까요. 아.. 그래도 인생에 한 번쯤은 오지게 이쁨 받고 그 추억을 간직하고 살 수 있다는 것도 나쁘지는 않고요.
-아… 고민되네요. ㅋㅋㅋㅋㅋ
둘은 어느 쪽이 나은지 정작 본인은 없는 자리에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늘 이렇게 한국분을 만나 좋은 대화 나누게 될 줄 몰랐어요. 좋은 날이네요.
-저야말로 한국 남자 친구랑 사귀는 따님을 두신 분이랑 대화 나누게 될 줄 몰랐어요.
둘은 똬하하하하 크게 웃고 헤어졌다.
루이를 많이 만지고 싶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아주 길게 조잘거렸다는 건 비밀. (계속 루이랑 손으로 놀았음)

집에 가는 길에 카나짱이 가르쳐 준 식당에 가서 도시락을 주문했다.
-그거 알아? 도쿄대 앞에 대박 정식집이 있는 거.
도리도리도리도리
-하토야마 전 총리가 학생 때부터 애정하고 아직도 집까지 배달시킨다고 이 동네에선 그렇게 유명하대. 나도 도쿄대 근처 가면 꼭 여기서 저녁밥 사 가거든? 조림도 무침도 그냥 집에서 먹는 반찬들이 엄청 맛있어. 장인의 손길이야.

<모리가와>라는 이름의 작은 식당이었는데 오픈하자마자 손님들이 마구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고 유명세를 단번에 알았다. 구글 이미지를 보면 볼수록 메뉴를 정할 수가 없었다.

출처: 구글

닭튀김도 맛있어 보이고

출처: 구글

해산물 돈부리도 맛있어 보이고

출처 : 구글

튀김도 맛있어 보이고

출처: 구글

뭐야… 함박스테이크도 대박.. 비주얼

결국 위의 함박 스테이크와 새우튀김 도시락을 시켰다. 서비스도 엄청 좋았다.
모양새는 여느 도시락집 느낌인데 먹어보니 확실히 달랐다. 메인 메뉴는 말할 것도 없고 곁들인 조림 반찬, 살짝 껴 주신 절임 반찬 이런 것들에서 깊은 맛이 느껴졌다.

다른 날은 해가 더 짧아져서 노을빛으로 변해가는 오후 햇살과 도쿄대 시계 콜라보를 한껏 즐겼다.

낙엽이 지면 다시 또 와야겠다.

그리고 도쿄대학교 매점에 들어가 기념품 코너에서 도쿄대학교 한정 문구를 막 쓸어 담았다. ㅋㅋㅋ 이런 거 사고 있는 사람 백 프로 도쿄대생 아니란 티가 팍팍 나겠다. ㅋㅋ

출처: 도쿄대 홈피

참고로 2개에 550엔 아니라 1개에 550엔짜리 지우개 ㅋㅋㅋ 왠지 포장도 금색인 게 이걸로 지우면 무슨 시험이든 너에게 합격 목걸이를 쥐어 줄 거 같잖아요.

클래식한 노트, 볼펜 등등도 샀다.
사실 이것들은 일본에 아들과 놀러 온 메텔에게 동네 선물로서 증정했음. (도쿄에서 아들들과 함께 만나 도쿄 관광한 신나는 포스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일본 여행 중에 조용한 장소를 원하신다면 문구 덕후시라면 도쿄대학 산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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