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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여름방학이 끝나고 카나짱을 다시 만나기로 한 곳은 스페인 요리 전문점이었다. 카나짱은 파에야를 아주 좋아해서 종종 사 먹기도 하고 집에서도 시판 밀 키트를 써서 만들어 먹기도 하는데 몇 년 전 카나짱 집에 놀러 갔을 때 나에게도 만들어 줬었다. 그때 난 처음으로 파에야를 먹어보았다. 시푸드 맛이 잘 배인 맛있는 해산물 볶음밥이군! 나도 너무 맘에 들었다. 카나짱은 베네수엘라에서 유년시절을 보내 스페인어도 할 수 있는데 스페인 음식도 쉽게 접했던 걸까? 상관없나?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겠다.

카나짱이 맛있는 파에야 집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히비야 미드타운 안에 있는 <Lubina>

일주일에 두 번 파트타임으로 사무일을 시작한 카나짱이 건강에 대한 걱정을 한 아름 안고 왔다.
-나 오늘 동짱한테 물어볼 게 있어. 넌 감기도 안 걸리고 잘 아프지도 않잖아. 엄청 걸어 다니고.
-그런가?
-그래, 난 툭하면 감기 걸리고 좀 무리하면 몸살 나고 유행하는 병은 한 번씩 다 걸리고.
솔직히 내가 건강하기보다… 카나짱이 약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듣고 있었다. 카나짱은 정말 유행의 선두주자처럼 독감, 코로나, 노로 바이러스.. 뭐만 돌면 뉴스에서 나오기 무섭게 바로 걸려있었다. 한국이었으면 기가 허하다고 한약을 달고 살았을 타입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너처럼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까? 나 너무 그 비결이 궁금해.
음.. 진짜 내가 뭘 하는 게 없어서 해 줄 말이 없었다. 한 가지 확실히 카나짱하고 다른 건 먹는 양이었다. 난 체중 유지한다고 소식할 뿐 맘만 먹으면 상 다리째 아작 낼 수 있는 위를 가진 반면, 카나짱은 늘 시킨 음식을 끝까지 먹지 못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힘든 짧은 입의 소유자.
음.. 그런 유전적인 이유가 있지 않겠어? 우린 의학적 지식도 없으니 댓글에 댓글을 달듯 이야기는 뱅뱅 돌다 말았다. 같은 나이대의 친구인데도 이렇게 체력이 다르다는 게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했다. 무기력하려고 무기력한 게 아니라 정말 평범한 일상생활도 체력적으로 버거워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작년부터 마흔의 나이에 드디어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카나짱. 나라에서 하는 무료 교실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며 엑셀을 처음으로 배웠단다. 당황스럽지만 일본에는 그런 사람이 아주 많다. 하지만 카나짱의 대단한 점은 한 번 시작하면 성과를 낼 때까지 한다는 것이다. 올해엔 여성 취업 지원센터를 통해 사무직까지 구해서 일을 시작했다. 대단하지 않은가. 못하니까 부끄러워서 부끄러우니까 시작도 못하는 네거티브 사이클이 아니라 모르면 배우면 되고 배웠으니 부딪혀보는 얘가 나는 너무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정신력 있는 아이가 체력이 부족해 허덕이는 게 또 너무 안타까웠다.

-나 아이폰 신형으로 바꿨어! 그거 알아? 인물사진 엄청 잘 나와! 내가 찍어줄게! 이거 봐! 장난 아니지?
2018년부터 쓰고 있는 내 아이폰 엑스도 아웃포커싱 기능이 있지만 오 진짜 장난 아니다! 하며 이제 아이폰의 이 기능을 알게 된 카나짱을 매우 환호해줬다.

-참, 근데 나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 세상에 태어나 처음 거북목과 일자목의 고통을 알았잖아. 나 입사하고 몇 주 뒤에 목이 안 움직여져서 일을 쉬었어.
익숙하지 않은 컴퓨터 작업을 어깨에 잔뜩 힘을 주어하다가 팔까지 마비된 것처럼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ㅋㅋㅋㅋㅋ 너 인생 왜 이렇게 귀여운 것.
그래서 물 마시려고 고개를 드는 것도 어려워하니까 일곱 살 딸이 엄마 그럼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접시에 물을 따르고 개처럼 핥아먹는 건 어때? 제안해서 반나절 핥아먹었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웃겨서 숨이 차는 나는 겨우 겨우
-빨대로 마시면 되잖아 ㅋㅋㅋㅋ
말하니
-어 ㅋㅋㅋ 그날 저녁에 빨대 생각을 해냈어.
라며 카나짱이 같이 웃었다.

원래 나도 컴퓨터 작업할 때 고질적으로 목부터 어깨까지 근육이 뻑뻑해져서 심각할 땐 두통을 유발한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요즘 한류스타 인터뷰 타이핑하면서 (특히 욕심부리며 빨리 작업할 때 ) 재 발병했다. 케군은 뭐 몇십 년째 만성으로 거북목이 심해 이제 거북이가 될 지경. 컴퓨터 할 때 목 망가지지 않는 자세를 컴퓨터 교육에 세트로 끼워 넣어야 한다. 절실하다.

카나짱의 추천으로 시킨 오징어 먹물 파에야는 밥알이 바닥에 그을리듯 들러붙어 엄청 맛있는 누룽지였다. 원래 이렇게 빠삭하게 나오는 파에야도 있단다. 카나짱은 특히 이런 누룽지 스탈을 좋아한다고 했다. 돌솥 비빔밥스런 파에야는 신세계였다.

그리고 그냥 가기 아쉬워 긴자 <마리야쥬 프레르> Marriage freres 홍차 전문점에서 차를 마셨다. 앉자마자 메뉴판이 서양판 동의보감 같이 끝도 없이 계속 있어서 매우 당황했다. 궁서체가 깨알같이 계속됨. 몇 종류를 읽다가 그냥 잘생긴 남자 직원분께
-たすけてください。(살려주세요)
도움을 요청했다. 풉. 웃으며 자상하게 추천해주신 티로 결정했다.

레몬 케이크 하나 시켜서 반씩 나눠먹음

내가 설거지할 때마다 광대를 위로 올리는 얼굴 근육 요가를 하다 보니 싱크대 앞에만 서면 그 얼굴이 자동으로 나오는데 눈은 웃으면 안 되니까 입만 웃는 조커 상태가 된다고 시범을 보이자 비싼 차를 줄줄 흘리며 카나가 정신을 놓고 웃었다.
-다시 해 봐
-봐봐 이렇게 不気味に笑うのがポイント부키미니 와라우노가 포인토 (소름 돋게 웃는 게 포인트야)
-不気味!!!부키미!! (기분 나빠 ㅋㅋㅋㅋㅋ) 나도 할래 ㅋㅋㅋ 기분 나쁘게 웃기.


그리고 며칠 후 카나에게 연락이 왔다.
- 나 생리 때마다 너무 힘들어서 검사했더니 자궁암 의심된다고 정밀 검사해 보재.
심장이 쿵 떨어졌다.
카나짱의 어머님은 젊은 시절 내내 대량의 생리혈과 자궁 근종 등 끊임없이 자궁 문제를 안고 계시다가 마흔에 적출을 하고 편해지셨다고 한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암이라는 단어는 한순간에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카나짱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나 확실하게 갱년기래.
마흔한 살 친구의 갱년기 진단 또한 상당한 충격이었지만 믿음직스럽게도 카나는 씩씩하게 검사는 해 봐야 아는 거니까 아직은 걱정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한 지 일 년이 넘도록 쌓아두기만 한 박스들을 같이 날 잡아 치우기로 했다.
-카나짱, 얼마 전에 미호짱이 갱년기 진단받고 태반 주사 맞았는데 보험 처리돼서 500엔 밖에 안 냈대. 근데 그거 알아? 그 후로 미호짱 얼굴이 하얗다 못해 투명해졌어. 잡티와 주름이 사라졌다니까. 갱년기가 돼야 싸게 맞을 수 있는 태반 주사의 부작용은 톤 업이야.
-와우… 나 그거 맞을 수 있는 거야?
-응응. 그리고 그거 맞으면 무기력한 것도 좋아진대.

세상은 좋아졌고
수다를 좋아하는 내 친구들과 나는
수다 속에서 또 기쁨을 찾아갈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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