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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석으로 빨아들인 듯한 철가루 헤어스타일로 일어났다.

조식을 제공하는 곳이라 식당으로 고고. 하루는 갓 구운 빵을 맛있게 먹었고

나는 에노시마 답게 시라스 (찐 잔멸치)를 밥 위에 올려 든든히 먹었다. 그때 늘 그렇듯 하루가 물을 엎었다. 평소 같았으면 원망의 눈빛을 막 쏘고 조심 좀 하지 그랬냐고 참지 못해 한 마디씩 꼭 했을 텐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하루야 괜찮아??? 다친 데는 없는지 걱정만 되고 사람을 불러 죄송한데 바닥을 적셨네요. 하며 대처에 바빴다.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이번 여행 때 둘째 날 짐을 줄이려고 일부러 사이즈 작은 파자마를 가져가서 마지막으로 입고 호텔에 버리고 오려했다. 물을 엎지른 그 시간에 하루는 어차피 버릴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직원분이 오셔서 애기 옷 버려서 어떡해요. 갈아입을 옷 있으세요? 걱정 걱정을 하는데. 아유~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화는커녕 이렇게 온화할 수가 없고요. 옷 걱정은 하덜덜덜마세요. 아하하하하하하. 나의 뼛속부터 온화한 태도를 보시더니 직원 아주머니께서 젊은 엄마가 너무 아이를 잘 키우시네요. 혼내지도 않고. 하면서 감탄을 하셨다.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구나. '곳간에서 인심 난다' 어차피 미련 없는 옷이 젖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으니 여유가 미어터진 것이다. 육아? 돈과 시간만 무한으로 주세요. 아이스크림에 케첩에 범벅이 되어도 바로 나가서 새 옷을 사 입힐 시간과 돈만 된다면 어떤 엄마가 화를 낼까 뭐 그런 상상을 잠시 했다.

티셔츠 한 장만 여벌 옷으로 가져와서 갈아입음

가방이 무거우면 두통이 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내 옷도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 이런 차림으로 하고 다녔다.

체크아웃을 하고 이유 없이 정처 없이 아침 바다를 보러 가기로.

그냥 이 역 자체가 명소인 '가마쿠라 고교 앞' 정거장. 그림 같은 곳이다.

한쪽에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과 팀이 있었다. 소품으로 쓴 건지 모래 위에 이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웨딩업계 극한 직업일세. 모래에 그림도 잘 그려야 하는가. 스탬프로 찍어낸 듯 진짜 기계처럼 잘 그렸다.

하루에게 많은 가마쿠라 추억을 안겨 준 에노덴.

종점인 후지사와에서 출발해 바다 보고 반대편 종점인 가마쿠라 역에 와서 사물함에 짐을 잠시 넣어두었다.

가마쿠라 역 주변도 조금 구경하면서 다음 목적지에 이동할 생각이었는데 해가 점점 높아지자 슬슬 기온 때문에 하루가 지쳐가기 시작했다.

나의 엇나간 핀트만큼 하루의 정신이 뭉개지고 있었다. 인상을 팍팍 쓰며 찡찡이 시작됨.

서둘러 목적지로 가자 가자. 가는 동안 애써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하루야 저기 봐. 인력거다. 멋지다~" 지나가는 풍경이나 볼거리에 화제를 돌려봐도 이미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영 시원찮다.

(銭洗弁財天 宇賀福神社 : 제니아라이벤자이텐 우가후쿠진자) 보통 줄여서 '제니아라벤텐' 이라고 불리는 절로 가는 길엔 음식점도 상점도 거의 없어서 유일하게 있던 떡집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대여섯 팀이 줄을 서 있었지만 여기밖에 없다 싶어 기다렸다 먹고 가자고 했다.

아니 근데 이 녀석 힘들어서 더는 못 가겠다 징징대더니 힘들어서 기다리는 것도 못 하겠다 징징. 이거 말곤 가게가 없다고 하니 진짜 싫다며 징징. 지금 당장 내가 여기 옆에 다른 팥떡 집을 개업해 낼 수도 없는데 엄마 보고 어쩌라는 거지. 슬슬 마음이 요동친다. 화장실이 급해졌다고 해서 가게 화장실을 빌렸다. 다시 줄을 서는 곳에 돌아왔는데 <화장실만 이용하고 가는 분들 사절>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헐... 안 좋은 예감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은 하루는 그 자리에서 쭈그리고 앉아 자기는 이 집 딱히 먹고 싶지도 않은데 엄마 때문에 억지로 기다리는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속을 긁기 시작했다. 그냥 줄에서 이탈하자니 배설하고 튀는 진상짓이 되고 저걸 억지로 끌고 자리에 앉혀 팥죽을 먹이자니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어이가 없고. 부글부글 끓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 불손하게 말하는 한 마디에 아주 딥한 빡이 왔다. 뭐하러 저 놈 입에 달콤한 걸 넣어줘. 오만 인상을 쓰고 앉아 있을게 뻔한걸 왜 데려가. "따라와" 하며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터덜 터덜 비실 비실 따라오는 놈을 상대도 안 하고 걸었다. 어느새 울음으로 바뀐 하루가 완전 애기가 돼서 질질 울며 따라온다. 진짜 싫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이런 상황. 도대체 나는 어떻게 했어야 정답이었어? 나는 진짜 그걸 묻기 위해 하루한테 말을 걸고 있는 건데 계속 질책과 비난밖에 안 되고 있다. 말투가 곱지 않고 다 뾰족하다. "엄마가 뭘 어떻게 해야 돼? 힘들면 쉬다 가는 게 맞잖아. 가게는 하나고 손님이 많으니까 기다려야 하는 거고 그게 싫으면 걷는 것뿐인데 너는 왜 또 안 걸어. 뭐 업어서 가야 돼? 이러려고 왔어?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걸 엄마 탓인 것처럼 그러는데?"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진짜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하나씩도 못하겠고 아이는 대답을 못하니까 나만 나쁜 년 되고 근데 난 이 질문이 멈추지 않고 아이에게 공감하고 자시고 그딴 게 다 뭔 개소리야. 이런 상황에 뭘 공감을 어떻게 해. 사람이 어떻게 사람한테 이러는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지금까지 축적해 온 육아책이고 오박사 님의 지침은 그냥 다 뜬 구름 잡는 먼 이상이 되는 순간이다.
한참을 말없이 둘이 눈치 싸움을 하면서 걸었다. 축 처진 어깨가 지난 과오를 후회하고 있는 것보다 엄마가 화내는 게 너무 서글프기만 한 모습이다. 나도 내가 너무 벌레같이 싫어진다. 나 같은 엄마 내가 제일 싫었다. 그래서 울고 싶은 건 다름 아닌 나다.

절에 들어서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누그러진다. 엄마... 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에 온순함이 묻어있고 그게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나도 용기 내서 화 난 티를 (아직 화는 나 있다) 최대한 뺀 말투로 대답해 본다. 하루는 쬐끄만게 처세술만 늘어가지고 "엄마.. 아까는 미안했어..." 그러면 공식처럼 나도 "아니야.. 엄마도 너무 많이 화 내서 미안했어." 너무 화난 날은 그걸로 끝내지 않고 덧 붙인다. "근데 하루 뭐가 미안했어?" 구체적으로 반성한 증거를 제시하라 이 말이다. "아까 하루가... 너무 힘들다고 기분 안 좋고.. 안 걷고.. 그래서 미안했어." 그래, 알았으면 됐어. 엄마 진짜 곤란했어.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그날은 또 한 마디 더했다. "근데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았어? 엄마가 뭐 잘못했어?" 엄마가 완전히 화가 풀리려면 이유를 알아야 하겠다는 압박이다. "진짜 미안한데.. 기억이 안 나. 하루도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았는지 처음의 이유는 잘 몰라..." 그 말을 듣고서 그래.. 알았어. 다음에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서로를 토닥였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매점에서 빙수를 하나 사 줬다. 아직 앙금이 진하게 남은 나는 뭐가 이쁘다고 저걸 갖다 바치나 이가 갈렸지만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아 본다. 이런 순간을 어떻게 선택하는지에 따라 아이 마음에 부모가 어떤 인상으로 남는지 결정되는 거 아닐까 하며 또 못된 나를 다독이고 격려해서 애써 웃는다. 정말 별 것도 아닌데 쉽게 평정을 찾지 못하고 언제까지고 질질 기분을 끌고 간다. 더워서 힘들어서 어린아이가 징징 한번 한 걸 가지고 털어내질 못하나. 이렇게 못 되 처먹어서 난 육아가 힘들다. 외동만 낳아 키운다는 건 내게 있었을지 모를 둘째와 셋째의 인생을 구한 결과가 되었을 거다. 장하다. 나는 그들의 인생을 구했다. 그렇게 나를 위로해 본다.

눈앞에 더없이 정적인 입구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가까스로 잊을 수 있었던 거 같다. 감사하도록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미안함, 뻘쭘함, 안도감이 섞인 얼굴. 미안해 엄마가 너무 모자라서.  

진짜 엄청 길게 느껴진 여정 끝에 도착한 ‘제니아라벤텐’ 신사. 양초, 향, 소쿠리 3종 세트를 구입했다. 먼저 양초에 불을 붙여 촛대에 꽂고

향에도 불을 붙여 커다란 항아리에 꽂아 놓는다.

보통 소원을 빌면서 꽂나…? 나도 잘 몰라서.. 대충 흉내 내보자.

그리고 안 쪽 동굴로 들어가면 물이 흐르고 있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재물 운이 잘 따르길 염원하는 마음으로 정갈히 씻는다.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인 이 아이는 박박 아주 오래오래 동전을 씻었다. (지폐는 훼손되니까 살짝 적시는 정도로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사죄의 마음으로 기분 좋게 엄마 찍어 줌. 보통 때는 귀찮다고 절대 안 찍어준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씻은 돈을 의미 있는 곳에 써야 효험이 있다고 하던데 과연 이 돈을 어디에 써야 신령님이 잘했다고 흐뭇해하려나. 먹는데 쓸까 선물을 살까 필요한 걸 사야 하나 머릿속이 횡설수설하고 있는 바로 그때, 빈 인력거를 끌고 우릴 지나쳐가는 아저씨를 만났다. <가마쿠라 역까지 3천엔> 아무렇게나 자른 골판지에 쓴 손글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은 글씨를 읽고 서로의 얼굴을 동시에 바라본 하루와 나는 눈이 딱 마주쳤고  “가마쿠라 역까지 갑니다~ 타실래요?”  아저씨의 질문이 그 사이를 들어왔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루를 확인하고 “하이!” 시원하게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방금 씻어 온 돈을 전부 드리고 조금 더 보탰다.

아까까지 죽상을 하던 우리는 광대가 아프도록 웃음이 났다. 이 보다 더 기분 좋게 돈을 쓸 수는 없었다.

“여기가 작은 개천인데도 엄청 큰 게가 살아요.”
“이 동넨 차가 은근히 많아요. 관광객도 많지만 살기도 많이 살지요.”
“여기 엄청 분위기 좋은 대문 있는데 인력거랑 잘 어울리거든요. 사진 찍어드릴게요.”
알아서 척척척. 아저씨 부라보.

놀랍게도 인력거는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사람의 힘은 대단했다. 같은 인간이라도 신체능력의 차이는 얼마든지 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체감하는 건 흔치 않을 것 같다. 근육질에 초콜릿 색 피부의 사람 둘을 태우고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커브를 돌고 오르막 길을 뛰는 아저씨의 뒷모습은 나와는 다른 생물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었는데 내가 지금 타고 있는 게 인력거라니 여기가 가마쿠라라니 뇌가 바로바로 현실에 적응을 못하고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인력거를 발견하고 눈을 마주치며 화색을 한 이유는 얼마 전에 같이 본 인력거 다큐멘터리 때문이었다. 아사쿠사의 어떤 회사 이야기였는데 인턴사원이 정식 인력거 기사로 승격되기까지의 과정을 봤다. 가이드도 해야 되고 차들이랑 같이 통행해야 하니까 안전도 신경 써야 하고 체력도 서비스도 필요했다. 결국 아무리 도전해도 합격 기준에 못 미친 인턴 한 명이 인력거 회사를 그만두며 포기했는데 다큐니까 당연한 거지만 너무 현실적인 그 결말이라 오히려 잊히지가 않았다.  그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뭘 할까.. 중간까지만 읽은 동화책처럼 더욱 내 마음에 남아버렸다.

그 얘기도 인력거 아저씨와 나눴다. 아저씨는 그래서 보자마자 타셨구나!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어제는 밤에 문을 열고 잤는데 바닷바람에 너무 추워서 중간에 깼다고 하셨다. 아침에는 눈 뜨자마자 에노시마 바다에서 한참 수영을 하고 이제 막 일을 나왔다고 했다. 놀란 눈으로 하루를 바라봤다. 하루도 신기하고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게 되어 너무 기뻤다.

가마쿠라 역에서 인력거 아저씨와 작별을 하고 (자꾸 아저씨 아저씨 그랬는데 나랑 동갑일지도 모른다. 내 나이는 생각을 안 하는구만) 케군이 당부한 <하토 사브레> 과자를 샀다. 하루가 자꾸 하토 사브레 (하토= 비둘기)를 토리 사브레 (토리=닭)라고 잘못 말해서 웃겨 죽겠다.

나는 차 시간이 조금 남았길래 역 근처에서 멕시코 음식을 포장했다. 원래 이런 거 가차 없이 안 기다려주는데 오늘은 더 싸우기 싫으니 말없이 기다려주는 느낌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회성은 길러지는겅가요.

난 브리또와 레모네이드 먹을 생각에 두근두근

도쿄로 돌아가는 전차 안에서 가마쿠라와 에노시마 이야기를 잔뜩 했다. 지난 시간은 뭐든 다 아쉽고 좋은 일만 떠오르는 게 참 신기하다.

안녕!!! 가마쿠라!!
아직 전차를 향해 손 흔드는 게 부끄럽지 않은 나이. 또 둘이 가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니 처음 도전한 둘 만의 여행이 꽤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같이 동영상을 편집하며 그날의 좋았던 느낌을 다시 함께 우려먹고 우려먹었다.

https://youtu.be/drXL0h5xi_U

마지막 영상입니다.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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