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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하는 여자

청소 강박을 깨닫기

Dong히 2023. 12. 21. 15:15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요상한 생리 전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검색해도 나 같은 사람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았다. 뭐냐면 생리 전만 되면 신기하게 결벽적인 구석이 생긴다. 애지중지 자라지도 않았고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습한 반지하 말곤 살아 본 적 없고 평소엔 안 그러는데 생리 전만 되면 더러운 걸 참지 못하겠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생리 전에 화가 난다. 그때마다 지금 이 분노의 원인은 뭘까 곰곰이 거슬러 올라가 보면 꼭 지저분한 집안, 정리 안된 물건들, 흘리거나 묻은 이물들이 방아쇠였다. 그럼 깨끗하게 치우게 되고 좋지 뭐 하겠지만 참 골칫덩이인 게 아이랑은 끊임없이 더러운 상황이 생기는데 내 인내심이 생리 전과 후의 차이가 너무 심해서 아이에게 혼란을 준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세상 아무렇지 않았던 집안 풍경이 갑자기 그 시기만 되면 화장실보다 더 더럽게 느껴져서 엄마가 돌변한다고 생각해 보라.

왜 화까지 나냐면 온 집안이 구역질이 나도록 더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머릿속으론 안다.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아. 아이는 할 만큼 했고. 나중에 한꺼번에 치우면 돼.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이걸 제자리에 반듯이 넣고 물기 없이 닦아내지 않으면 메스꺼운 걸 본 사람처럼 초조하고 역겨운 것이다. 그래서 나만큼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들에게 (당연하다) 화를 내게 된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미친 거 같다.

다른 곳에서도 그런가 궁금해서 주의 깊게 내 감정을 관찰해 봤다. 일하는 곳은 피크 타임이면 주방이 전쟁터로 돌변한다. 쓰레기통 주변은 몇 시간 만에 초토화되고 남이 먹고 자릴 뜬 테이블이 안 더러울 수 없는데 나는 한 번도 더럽다고 느끼지 않았다. 친구 집이나 항상 정돈이 안된 카페에서도 그런 기분은 안 들었다. 그래서 ‘내 공간’이 파괴되는 것에 민감한 건 아닐까 추측해 봤다. 우리 집은 내가 관리하고 소유하고 귀속되어 있는 곳이고 그런 곳이 더러워지는 게 화가 나는 게 아닐까.

사실 하루랑 케군은 부족함이 없는 가족 구성원들이라 치우라고 하면 군말 없이 치우고 썼던 물건을 제자리에 잘 두는 편이다. 아쉬운 점은 나와 타이밍에서 괴리가 있다. 둘은 자기 전에 제자리에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럼 언제 깨끗한 집을 즐겨? 자기 전까지 더러운데..? 집이 깨끗한 걸 난 자느라 못 보잖아…?  내 주장은 그러하다.

그래서 이 몹쓸 이기적인 생각을 고쳐보려 여러 가지 자극을 찾아봤었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건 이적 어머니의 말이었다. 세 아들을 고학력으로 키운 어머님 본인도 학업에 바쁘셔서 집 안 청소를 별로 안 하셨다는데 오히려 여기저기 널린 책을 줏어 읽으며 아이들을 똑똑해지더라고. 그래, 더러운 집에도 메리트가 있어. 라며 날 달랜 것이 그나마 길게 효과를 봤다. 하지만 생리 전 증후군이 최고점에 치닫으면 이런 뒌장할 집이 더러워죽겠는데 고학력이 무슨 소용이야. 이딴 애가 장가가면 며느리랑 부부싸움밖에 더하겠어. 막말로 드러운 집 애가 서울대를 더 가겠어 가정부 써 가면서 집안에 광 내는 집 애가 서울대를 더 가겠어. 맘 속으로 몇 번이나 상다리를 뒤집어엎었다.

하아.. 마인드 컨트롤은 어렵고 가족들을 괴롭히기도 괴롭고 내가 화가 나는 걸 계속 참는 건 더 못하겠고 어쩌지 고민에 빠진 어느 날 밤. ‘내 공간’을 줄여보자는 획기적인 발상을 했다. 내 안에서 내 방 이외의 거실 세면실 등등의 모든 구역을 버려보자. 실제로 케군 방에 먼지가 쌓여도 어차피 쉬는 날 케군이 몰아서 치울 걸 알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이 경험을 점점 넓게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집은 다 내 것이 아니다. 일주일은 내 집이 아니다. 나도 잠깐 빌려 쓰는 하숙생이 되어보자.

대신 내 방만은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답답한 장식장을 거실에 버리고 아니 내놓고 오랫동안 안 쓰던 물건들은 쓰레기 봉지에 넣었다. 4 봉지 나왔다. 그리고 최대한 공간을 넓혀 보기만 해도 탁 트이게 정돈했다.
거실이 무슨 상황이 되어도 이 안에서 분리되어 미국 드라마를 보며 얼굴에 팩을 올릴 수 있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이렇게 다음 달을 관찰해 보기로.

하숙생 3호로 입실을 허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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