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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릉부릉 나들이 시동을 켜고 장소를 물색하던 우리는 의견이 엇갈려 계속 결론을 못 내고 있었다. 케군은 관광업 회복으로 어딜 가나 사람 많은 곳에 지쳐있었고 나는 그렇다고 귀중한 3일 연휴를 집에서 보내는 건 하루 유년시절을 아깝게 보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특별한 건 없지만 그래도 갈래? 시큰둥한 케군을 살살 꼬셔 근교 여행을 나섰다.

호텔 예약 직전까지 치바에… 뭘 하러… 가나… 갸우뚱하는 케군에게 내 생각을 열심히 전했다.
“치바에는 하루가 좋아하는 고성이랑 과학관이 있어.”
하루가 태어난 이후 나의 최대 관심사는 늘 육아였지만 요즘 하루랑 함께 할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감이 느껴지고 나선 더욱 행동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으로 삼기엔 다소 지루하고 유치한 과학관을 메인으로 이틀간 여행하는 건 내 나름의 전력질주를 하는 방법이다. 나중에 나이 들어 아이에게 좀 더 신경 써 줄 걸..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하며 시간을 보낼걸.. 후회하지 않기 위한 모종의 방지책이고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아이를 위한 오락이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돈도 많고 시간도 많고 대담함까지 있었다면 여러 나라에 한 달 살기 이런 것도 도전했을 텐데… 어느 하나 안 부족한 게 없어. (물론 이것 말고도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정말 실제로 그런 행동력을 보이는 어머님들과 보내주는 아버님들 진짜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여보야, 하루가 이 사소한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동네에도 과학관은 있지만 또 다른 전시가 있잖아. 그 작은 차이들을 얼마나 애가 좋아한다구. ” 그런 말로 케군을  설득하면서 속으론 아이를 위해서 사람이 붐비건 얼마가 들건 시간만 되면 새로운 체험을 시켜주기 위해 어디든 가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다구. 옆 동네 과학관도 망설이는 케군 정말 너무하다 너무해. 좀 원망도 들었다.  
케군은 그 말을 덥석 물진 않았지만 치바엔 관광지가 없잖아. 얼마나 사람이 없겠어.라는 말은 살포시 물었다.

아수라장같은 도쿄역 빵집 안을 비집고 높은 의자에 위태롭게 하루를 앉혔다. 가방 둘 자리가 없어 등에 매고 끌어안고 셋이 빵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도쿄역에서 끼니를 해결할 때마다 꼭 피난민이 된 거 같은 착각이 든다.
알면서도 도쿄역에서 밥을 먹기로 한 건 전국의 기라성 같은 맛집이 촘촘히 수놓아져 있어서 괜히 기대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번이나 만족했을까? 좋았는지 어쨌는지 그냥 아예 기억이 없다. 어느 코너를 돌아도 수돗물처럼 쏟아지는 인파 속에 이리저리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벅차 맛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이 전차를 끌고 다니는 것처럼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다녀 내 눈높이보다 낮은 무기들을 피해야 한다. 내 무기가 다른 사람을 치진 않을지도 바짝 긴장된다. 불편한 의자와 전쟁통 같은 곳에서 빵을 입에 욱여넣는 하루를 보니 안쓰러워 이제와 다시 생각하게 했다. 도쿄 역에서는 뭘 먹으려 하지 말아야겠다.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치바역으로 출발.
내 자리를 찾아가려고 하는데 어느 젊은 청년이 티켓과 좌석 번호를 번갈아 보며 오도 가도 않고 있었다.
-제가 한 번 봐드릴까요? 어? 자리 번호는 맞는데… 아 이거 조금 지연돼서 25호가 아니라 23호 차예요. 다음 차 타셔야 되는데? 내릴 수 있겠어요?
-앗…아.. 토모다치가..
다른 친구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당당히 이미 앉아있었다. 친구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내리기엔 너무 늦었다. 차가 스윽 출발하기 시작했다.
머쓱해하며 친구 옆으로 가서 앉은 청년에게 안심시켜 주는 말을 못 해서 좀 아쉬웠다.

솔직히 별로 큰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앞차를 타도 뒤차를 타도 금액은 똑같고 청년은 5분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뿐이다.  다가 온 역무원에게 청년들이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변경절차를 하는 모습을 봤다. 공항 가는 모양인데 전철로 연습했으니 비행기 잘못 타거나 하진 않겠어. (다 왜 내 애기들 같누)

치바역은 도쿄 바로 옆 도시고 내가 대학시절을 보낸 익숙한 곳이라 당일치기로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그래도 하룻밤 자면 그게 어디든 여행 기분으로 들뜨니 신기한 일.

작은 모노레일을 타고 먼저 성을 보러갔다.

빌딩 왼쪽으로 합성처럼 보이는 성이 목적지.
이런 곳에도 이름 모를 성이 있지 뭔가. 인지도가 없다는 의미도 있지만 진짜 단번에 읽을 수가 없어서 이름을 모르겠다.
여기는 猪鼻城跡 [이노하나죠] 라고 읽는 성이었다.
17년을 살면서도 어려움을 겪는 게 일본어 대명사 읽는 법인데 한자랑 고유명사 음독법이 절반은 특별히 법칙이 없어 종잡을 수가 없다. 사람이름과 지명이 심각하게 멋대로다. 그럼 홈페이지나 안내에 영어표기 아님 히라가나로 써줬으면 좋겠는데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위키피디아에 일일이 복사해서 알아내거나 하는 일이 많다. 일본 친구한테 일본사람들은 첫 대면하는 고유명사를 만나면 어떻게 읽는지 대충 감이 와? 하니까 아니 그냥 계속 물어보면서 새로 외우고 하는 건데? 라더라구. 일본인이어도 어린이들이 (어른도 가끔) 어떻게 읽는지 모를 때가 많으면서 왜 히라가나 표기는 아끼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루가 수집 중인 고성 스탬프 한 장을 사고 시작.

안에는 작은 박물관처럼 전시물이 있었다.
오래되고 묵은 느낌이 나서 거의 사람 없는 전시장이지만 케군은 한적하다고 좋아하고 하루는 뭐든지 다 관심 있는 아이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고 남는 장사였다. 나는 어디 풀어놔도 혼자만의 즐거움을 찾아 알아서 잘 노는 스타일이라 노프러블럼.

한국 사람들이 아빠다리 하면서 앉는 거 신기해하더니 옛날에 일본사람들도 아빠 다리 했구만. 뭐. 언제부터 무릎꿇기 시작했지?

1960년대 가정집 풍경이었는데 어? 마블 초코렛 그때도 있었어??? 충격이네. 이렇게 맛있는 걸 그때 부터 먹었다니. 개인적으로 엠엔엠 보다 마블 초코를 더 좋아하는데 특이하게 여러 사이즈로 만들어서 마케팅 효과를 보는 상품이다.

출처: 구글

여전히 슈퍼에서도 절찬 판매 중. 아닛 자세히 보니 귀퉁이에 1961년 탄생이라고 써 있었구나.
포켓에 쏙 들어가는 것부터 가끔 교통정리해도 될 정도로 거대한 사이즈를 만날 수 있다. 맞으면 죽을 거 같은 기둥 느낌도 있다.

왼쪽 항아리 같은 거 자주 보는데 이제야 용도를 알았다. 숯 넣는 거였구나.

미니멀 라이프와 레트로 인테리어 조합의 이 집 참 쾌적하네요.

성에서 나와 치바 과학박물관으로 향했다.

이제 혼을 쏙 빼놓고 정신이 없다. 애미 애비에겐 지루한 장소일지 몰라도 아이들은 안 그렇다니까 여기가 롯데월드가 될 수도 있는거야. 아이 낳고 세상 신기했던 게 이런 거다. 술도 안마셔 연애도 몰라 스마트 폰도 없어 본 아이들에게 이런 순수한 것들이 도파민을 팡팡 터뜨리는 현장.  귀여워죽건네.

문 닫을 시간까지 놀다가 아쉬움 가득 나왔다.
벌써 가야 돼? 하힝…ㅠㅠ
낼 다시 올 건데?
하루는 여긴 이제 다시 못 올 곳이다 생각했는지 초조하고 급하게 둘러보느라 제대로 못 본 것 투성이었는데 내일 다시 올 거란 말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얼굴을 보고 케군이 드디어 내가 말한 사소한 여행의 기쁨을 이해한 듯했다.

셋이 3만엔. 저렴하게 예약한 호텔 방에 체크인을 하니 헏!! 침대가 방을 정복하고 있었다. 사람이 겨우 지나갈 공간만 남기고 침대로 꽉 찬 ㅎㅎ
하지만 30분 있으니 바로 적응됩니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깨끗했었다. 그게 중요.

호텔 바로 앞의 이자카야는 대체적으로 비쌌기 때문에 신중하게 주문하고 편의점에서 군것질 거리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깨끗하고 심플한 대중탕 완비

우리는 짐을 줄이기 위해 미리 전화로 아이 사이즈 잠옷이 있는지 물어봤었다. 분명 프런트에서 주신다고 안내받고 일부러 하루 파자마를 안챙겨 갔는데 그날 아이들이 엄청 많이 왔는지 준비 된 옷이 다 떨어져서 없었다.
하루는 어른용 잠옷을 입고 불편하다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나는 한번 더 프런트에 전화해서 입어봤는데 역시 너무 크다고 다른 작은 여성용 사이즈라도 없을까요 물어보니 그게 가장 작은 사이즈라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답변만 받을 수 있었다.

하루가 본격적으로 징징 모터를 돌리려고 할 때 나는 하루를 딱 잡아 침대 맞은편에 앉히고 묵직한 목소리로 (협박조 살짝 들어감) 말했다.

파자마가 있다고 했는데 안 준건 호텔 잘못이 맞아.
근데 엄마가 혹시 다른 방법이 있냐고 물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봤어. 하지만, 없는 건 없는 거야. 없는 물건이 어디에서 나오지 않아. 우리가 무슨 말을 하건 없는 물건을 호텔 직원이 만들어 낼 수는 없어. 저분들도 엄마처럼 아빠처럼 여기에 고용돼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그럼 지금부터 우리는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느냐 우리한테 달렸어. 없는 파자마를 계속 생각하면서 울 수도 있고 같이 텔레비전 보면서 과자 먹으면서 파자마 말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놀 수도 있는 거야.

속으로 이게 먹힐까 반신반의했는데 하루는 마음을 고쳐먹어 줬다. 그 이후로 불편함을 티 내지 않고 체크아웃까지 원피스처럼 치렁치렁한 파자마 입고 지내줬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되다니. 나는 사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백 프로 케군의 영향이다. 이건 케군의 성향이고 삶의 방식이었다. 예전의 나는 왜 바보같이 당하고 살아? 어떻게든 나의 불쾌함을 표현해서 상대방이 알아야지라는 생각이었는데 케군은 그런 나를 신기하게 봤다. 정말 얻는 게 있을 때 쓰는 것이 감정과 시간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상황에서 계속 알려줬다. 점점 오히려 케군이 자기감정과 시간을 유익하고 이롭게 쓰는 것 같아서 똑똑해 보였고 지금까지의 내가 쓸데없이 손해 보고 다닌 것들이 보였다.

마흔이 다 되어서 알게 된 것들을 납득해 준 아홉 살 하루가 너무나 기특했던 밤이었다.

호텔 1층에 드링크 바가 있어서 탄산 음료를 원없이 먹었던 게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후… 이 호텔… 미워할 수 없군 이람서 ㅋㅋ

다음 날 체크아웃하고 모르는 동네에 모르는 가게에 평점 별점 모른 채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추첨 발표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마음이었지만 샐러드 바가 있어서 이미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나는 150엔 파이 크림 추가해서 함박 스테이크를 시켰고 케군은 포크 스테이크 하루는 카레를 시켰는데 전부 맛있었다. 크 맛있는 거 먹으면 그냥 다 좋은 여행.

둘째 날 다시 찾은 과학관은 체험 위주로 노렸다. 전날에는 늦게 들어와서 예약할 수 있는 체험이 하나도 없었다.

워크샵을 진행하는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볼런티어인 거 같았다. 과학 관련된 직종에 경험이 있는 분들이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과학 지식은 해박해 보이셨지만 연세때문에 단어가 잘 입에서 안 나오시는지 설명의 절반이
아… 그 뭐더라. 그거.. 그게.. 거 뭐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말을 수도 없이 하셨다. 우린 퀴즈 방송 보는 기분으로 셀로판 테이프? 아! 예 그거. 자외선?? 그거! 그거. 빛 투과??? 그거!
계속 할아버지가 뭔 말을 하고 싶어 하시는지 알아맞혔다. 맞추면 짜릿함. 뭐하는시츄에이션잉가.ㅋㅋㅋ

그러거나 말거나 애들은 눈 앞의 것들을 완성하느라 즐거웠다고 합니다. 케군이랑 뒤돌아서 웃참하느라 미칠뻔해따.

경사가 절벽처럼 느껴지는 착각의 방

달 표면의 무중력 상태 느껴보는 체험

VR 체험을 끝으로 실컷 놀고 집으로 간다.

아빠한테 얼마나 이 여행이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는지 계속 말해주는 하루. 케군은 아이의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해서 놀라는 눈치였다. 다행이다 케군이 좀 더 나이들기 전에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법을 쉽고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가 어릴 때 대단한 걸 해줬을 때보다 상자 자르고 붙여 싸구려 바코드 기계 같은 걸 만들어줬을 때나 자전거 태워 동네 무료 물놀이장에 데려가거나 하루종일 원 없이 모래 만지고 놀게 한 것이나 벽에 휴지 심 붙여서 구슬 터널을 만들어주던 것들이 가장 최선을 다해 후회없이 애를 키운 듯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의 자기 만족일 수도 있다. 아이의 정서에 뭐가 더 좋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케군도 이렇게 사소한 일이어도 아이가 한껏 만족하는 얼굴을 떠올리며 스스로가 좋은 아빠였다고 착각이든 뭐든 자부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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