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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되기 2시간 남은 늦은 밤.
-추짱! 내일 뭐 해! 나 내일 5시까지 시간 많은데
무례하고 상식 없는 권유에도 추짱은 콜을 해줬다. 동네동갑친구플렉스.
게다가 나는 도쿄에서 한 시간 넘게 떨어진 가마쿠라에서 에노덴을 갈아타고 바다 보며 밥을 먹고 싶다는 황당한 희망 사항을 늘어놓았다. 근데 좋대. 추짱..너의 자비로움이란… 다음엔 내가 아무리 느닷없고 장황해도 너의 버킷리스트를 다 들어주겠노라 다짐했다.

밤 11시 45분에 패션쇼가 벌어졌다.
빨간 티를 입었다가 다시 벗고 초록 티를 입었다.
요즘 나의 공식은 롤업 한 진청에 흰 양말이지만 왠지 내일은

이 베쥬 바지가 정답이다. 늑낌이 왔어.

우에노에서 만나 가마쿠라로 가는 전철을 타고 그린석에 카드를 찍었다.

이 한 장은 오늘 있을 일을 누군가 예견한 듯한 사진이렷다.

창 밖 풍경이 서서히 바뀌고

가마쿠라역에서 에노덴으로 갈아타는 동시에 여행기분 스위치 ON

여태 에노덴하면 강백호랑 서태웅이 학교 갈 때 타던 전철일 거란 생각. (꿈을 깨!! 철썩 철썩)

내가 자랑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해외 살이 하는 사람끼리 동갑내기 동네 친구가 생긴 것도 모자라 그 친구가 사진 일을 하는 프로에 ‘인물’ 사진만 좋아한다는 사실. 풍경 따위 관심 없고 나만… 찍어준다. 밀착취재 스타일로. 어딜 같이 다녀오잖아? 사진첩에 내가 가득… ‘ㅁ’ 성은이 망극…

그리고 에노덴을 배경으로 나의 에노덴 룩을 완성시켰다. 베이지와 초록. 나는 지난밤 에노덴을 아웃핏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어때!! 추짱!!!
추짱은 사진 찍을 맛 난다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가기 전날 밤 스무 살 마냥 야밤에 패션쇼까지 해서 완성시킨 피사체의 노력을 아낌없이 칭찬해줬다. 내가 뭐 이런 말을 들으려고 그렇게 한 거 맞아. 'ㅂ' 맞아!!

바다와 나란히 조금 걷다가

어젯밤 1시간 동안 후다닥 서치 해서 결정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았다. 이 계단 위로 가는 거 같은데??

우리의 느낌과 구글 평점만 믿고 처음 가 보는 곳이라 두근두근 했지만

오솔길 끝에 기쁨이 터졌다.

미친 뷰 봐. 멍멍쩐다!!! 아하하하하하하

붉은 차양막, 경계 없는 하늘에서 바다로 바뀌는 콘트라스트. 물개 박수가 절로 나왔다.

잠시 후 자리를 안내받았다.
테라스에서 가장 바다 쪽이 아닌 두 번째 열 테이블이었다. 딱히 나쁘다는 감상이 없던 나는 쉬운 여자였나 보다. 나와는 달리 추짱은 실망을 넘어 절망적인 얼굴이었다. 그래서 우린 직원을 불러 맨 앞열 자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되겠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한참 기다릴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고 재차 안내하셨고 난 최대한 예의 있게 “저희가 정말 멀리서 일부러 온 거라서요.” 사정을 했다. “나루호도!” (그렇군요!) 한마디로 우리를 이해하는 듯한 마음이 느껴졌다. 나중에 관찰해보니 능숙하고 주변 사람들을 지시하는 걸로 봐서 매니저급이었던 거 같다. 주소를 잘 찾았네.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리는 중.
너무 많은 인물사진을 받아서 고르기도 힘들어.

이런 것도 다 좋아.
학다리 에노덴

추짱의 까다로운 선택은 가치가 있었다.
지금까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배정당한 내 모든 테이블들이 아쉽게 느껴질 만큼.
2열과 1열의 차이는 우리 추억이 저화질로 재생되다가 멈추고 와이파이 켜서 4K 고화질로 다시 재생되는 '끕'이었다. 바다도 햇살도 공기의 질마저 달라졌다.

조금 더 어렸다면 가마쿠라까지 가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부산스럽게 계획했겠지만 이래 봬도 좀 살아봤다고 우린 바다 보고 밥 먹는 게 유일한 플랜이었기 때문에 오래 기다려도 조바심 나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질이 되었을 수도 있고 매번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을 수도 있다.

내가 누누이 추짱에게 이야기하지만 뷰가 좋네 인테리어가 좋네 뭐가 어떻든 음식 장사하는 곳에 음식이 맛이 없으면 다 헛 것이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옥탑에서 먹는 음식이 이렇게 맛있으면, 아니 이렇게는 맛있어야 드디어 만족스러워진다. 두텁고 쫀득한 수제 파스타.. 이건.. (수제비 식감)에 진한 해산물 소스.. 정말 완벽했다…
하늘 한 번 보고 홍합 입에 넣고
바다 한 번 보고 파스타를 입에 넣고 천천히 눈앞의 드라마틱한 풍경을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노력은 했지만 글을 쓰는 지금 정말 사진 속 저기에 내가 진짜 있었나 또 꿈같기만 하네...

https://amalfi-dellasera.com/ 가게 정보 남길게요

【公式】アマルフィイデラセーラ | Amalfi DELLA SERA

七里ガ浜 アマルフィ デラセーラ | 今日もごちそうさま!! ほぼ全席テラス席で江ノ島も見えますよぉ こうやって見ると海はエメラルドグリーンで綺麗だなぁ ヨットやサーフィンを楽しむ

amalfi-dellasera.com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를 지나 하라주쿠 방향으로 걷다 배고프면 쵸친이 즐비한 싸구려 라멘집에 들어가고 아기자기한 팬케이크와 크레이프로 입가심을 하고 온갖 구제 옷을 구경하는 재미도 아직 너무나 좋지만 조금 멀리 한적한 곳에 가서 마치 시간을 돈 주고 사는 듯이 오랫동안 음미할 수 있는 점심을 하는, 그냥 그게 다인 여행도 좋아진 내가 살짝 어른이 된 느낌이 들었다. 이제 한국에서 친구가 오면 나 조금 예전과는 다른 데를 많이 데려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모든 지구인들 힘내자…

슬슬 에노덴 역으로 돌아가 볼까

핡핡 추짱! 여기 초록해!

여기도!!

이 집 간판도!!

이 개찰구도!! 초!

록!

해!!!!

초록여행 안 끝남ㅋㅋㅋ
가마쿠라가 이렇게 초록했다니ㅋㅋㅋㅋ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한 거 없지만
일상이라고 생각하면 선물 같기만 했던 하루였다.
떠나기 전날 급하게 작당해서 이심전심으로 이 '좋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에 가장 가슴이 뜨거워졌던 날이었다. 추짱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새롭고 (한 사람의 평생을 알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새롭고) 더 많이 알았던 날이라 또 좋았다. 너는 내 블로그를 그렇게 오래 보고 이젠 구석구석 알 텐데 나를 만나면 뻔하고 시시하진 않니? 나도 너에게 늘 신선하고 싱싱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오늘 동짱의 초록 티가 주인공이네. 다 했네.
-이 티 1500엔인가 주고 샀는데... 정말 얘는 소명을 다했다. 여한이 없을 것 같지 않아?
-그러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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