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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떨구고 가는 길

오랜만에 하루랑 단 둘이 한국에 간다. 2019년 8월이 마지막이었으니까 4년 만이다. 네 살 아이였던 하루 몸땡이는 여덟 살이 되었지만 한국말도 잘 자라주었는지 두근두근했다.
일요일 케군이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쓸쓸히 차를 빌려서 쓸쓸히 운전해서 쓸쓸히 같이 아침밥을 먹고 공항 검색대에서 헤어졌다. 혼자 우두커니 우릴 들여보내는 케군 모습을 보니까 갑자기 원거리 연애할 때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생각났다. 항상 손을 흔들며 이별해야 했던 공항검색대 앞. 인천과 나리타에서 몇 번이나 눈물범벅으로 출국심사를 받으러 갔었던지. 근데 오늘 난… 들떠서 촐싹대는 생명체를 케어하느라 외롭지 않은데 케군은 다시 혼자 외로웠다.. 혼또니 미안네.


#너도 하루니? 나도 하루야

제주항공 탑승 게이트 앞에서 화장실도 들러보고 자판기도 구경하고 기웃기웃 대고 있는 동안에 한 아기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비행기 안에서는 꼼짝없이 붙들려 있어야 하니 좀 더러워도 어떠냐는 심정으로 “잇빠이 우고이떼까라 노로우네~” (많이 움직이고 타자~) 엄마가 따라다니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야, 화장실 옆에 애기들 플레이 룸 있는 거 모르시나 봐 우리가 가서 알려줄까.
-그러네. 너무 구석에 있어서 모르나 봐. 엄마가 알려주면 좋아하겠다.
-あの、トイレの横に授乳室と小さい赤ちゃんが遊べるスペースがありました。화장실 옆에 수유실이랑 애기 노는 데 있더라고요.

애기 엄마는 웃으면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하고 거북이 들어 올리듯 아이를 들고 그쪽으로 갔다.
탑승이 시작되고 자리를 잡는데 바로 뒤에 그 아기와 엄마가 들어왔다.
-あら!先の!後でしたね。また会いましたね。
어? 아까 그! 뒷자리셨네요. 또 만나네요.
하고 알은체를 하자
갑자기 아이 엄마는 하이톤이었던 목소리를 단숨에 지하까지 끌어내리며.
-저기.. 저도 한국사람이에요.
하고 수줍게 웃었다.
하루랑 나는 잠시 정지화면이었다가
어머!!!!!! 소리와 함께 우리 셋은 아하하하하하 웃었다.
-아까 아드님 하고 한국말하는 거 계속 들려서 한국분이신 거 알고 있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ㅎㅎ
-아 그러셨구나. 애기가 몇 살이에요?
-1살 8개월이에요.
-얘도 딱 그 맘 때 한국 처음 갔는데.
-はる、それは食べないよ。 (하루야 이거 먹음 안돼)
-네? 애기 이름이 하루예요? 얘도 하루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루끼리 수줍어하며 눈을 마주쳤다.
-너무 신기하네요. 엄마 한국사람이고 아들 하루고 아빠 두고 왔죠?
-네. 아까 보안 검색대에서 헤어졌어요.
-우리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루는 이 신기한 일을 한국 여행 내내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야기하고 할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빨리 알렸다. (할아버지 좋아해서? 이유는 모르겠고 하여간 급하게 알리더라고)

그렇게 친근해진 애기엄마는 우리 덕분에 조금은 편한 여행을 했다. 졸음을 못 견디고 후배 하루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 선배 하루가 좌석 사이에 쌀일이를 쏙 끼워서 작은 인형극도 보여주고 물병 포장지를 뜯어서 플라스틱 구기는 소리도 들려주고 질리면 봉지로 풍선 만들어 공놀이도 시켜줬다. 그렇게 혼을 쏙 빼놓다가 한계에 다다른 후배 하루는 무사히 기절했다.

내 귀에 멍멍이

#요즘 젊은것들은...

 

분명히 만석이라 그랬는데 내 옆자리가 계속 비어있다. 이러다 비행기 놓치는 건 아닌지. 얼굴도 모르는 옆좌석 승객이 걱정이 됐다. 내 오지랖도 태평양이다. 이륙하기 몇 분 전에 20대 일본 여대생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탑승해서 셋 중 한 명이 내 옆자리에 착지했다. 인천에 내리자마자 클럽에 갈 건가봉가. 짧은 핫팬츠에 보기만 해도 답답한 굽 높은 부츠에 진한 화장을 하고 손엔 다들 커피까지 들고 있다. 으이구 으이구 커피 살 시간에 게이트에 뛰어 왔어야지. 한편으로 이런 개꼰대띵킹하는 내가 너무 헛웃음이 나서 스스로가 민망했다. 

 

숨 돌릴 때쯤 인사를 나눴다.

-한국에 놀러 가시나 봐요~

-아 네~~ 한국분이세요?

-네. 저는 한국사람이에요. 저희도 일본에 사는데 잠깐 놀러 가요.

-그러시구나~

-가는 동안 잘 부탁드려요. 편히 쉬세요.

복도 자리를 막고 있는 학생에게 말을 터 주어야 나중에 화장실 갈 때도 화기애애하다. 그리고 귀찮게 안 하겠다는 취지의 인사말도 붙여야 부담이 없다. 학생은 친구들과 눈인사를 하며 '다행이야.. 좋은 사람들이야..' 하며 시그널을 주고받는 듯했다. 친구 셋이서 누가 둘이 앉고 누가 모르는 사람들과 앉을까 사다리를 탔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난 그런 일에 두근두근했던 성격이라 먼저 불안감을 해소시켜주고 싶기도 했다. (진짜 오지랖 'ㅂ' ) 하여간 풀메에 핫팬츠 시간 엄수 안 한 여대생한테 맴 속으로 혀 찬 나란 꼰대는 비행 중간에 인천 공항 세관 서류를 받아 든 그녀에게 홀딱 반한다. 어우 막 미리 쓰는 법 찾아와서 캡처한 거 보고 서류 작성 하고 있더라고. 오구 이뻐. 꾸미는 거 좋아하는 J였나 봐. 내 과였어. 수수하게 생긴 학생이 서류 캡처해 왔으면 별생각 없었을 텐데 핫팬츠 학생이 준비한 거 보니까 두배로 후한 점수 주게 되는 아이러니는 무엉가. 세상 참 쉽다. 내가 편견덩어리인 것뿐이지만 보통 다 편견 덩어리니까. 할 땐 하고 놀 땐 노는 빅 갭 한 번 보여주면 사람들은 좋아한다. 첫인상은 나빠야 이득이다. 그리고 백퍼 나는 꼰대더라. 요즘 내가 생각한 꼰대 철칙이 있는데 이미 엎질러진 꼰대화는 되돌릴 수 없으니 평생 입조심을 해야겠구나... 그 날도 나는 다짐했다.

 

뒤통슈귀엽지않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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