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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나가는 무렵
(여태 더운 날의 포스팅을 못 끝낸 나)

-미니야 카페 충전을 좀 하러 나서야하지 않겠어?
-좋은데 알아요?
-알긴 많이 알지. 못 가보고 있어서 그렇지.
ㅋㅋㅋㅋ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스크랩만 잔뜩 해 둔 카페 리스트를 열었다.

-蔵前 쿠라마에 쪽에 의외로 너무 괜찮은 카페가 여러개 생겼다더라고.
-아 얼마전에 갔던 곳도 거기 있었어요.

헛걸음하고 싶지 않아 오픈 시간을 노려 아침일찍 부터 약속을 잡았다.
지하철이 아닌 버스정류장에서 가게까지 이어진 골목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조용했다.

저기 저거 한국 여행객들 엄청 많이 찾는 레몬파이 성지집인데 여기 있었구나. 사방이 주택밖에 없는 허전하다 못해 낫씽스러운 곳인데 오직 이 레몬파이를 위해 쿠라마에를 들르는 거야?
딱히 볼 만한 뭔가가 있는 건 아니지만 보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없어서 분위기가 좋았다. 햇살, 길, 드문드문 끌리는 가게. 저 레몬파이집 맛도 그렇게 좋다던데 나중에 일부러와서 저것만 사가지고 가는 여유를 부려봐야지.

식물들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연광이 잘 드는 인테리어에 비해 안쪽은 암전 되다 시피 꾸며 콘트라스트가 극적인 것이 인상깊었다.


지구본, 빨간 벨벳 의자

앤틱한 가구들

줄 맞춰 뽐내고 있는 찻잔들

독백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꼭 연극 무대 같다.

늠흐좋아 이런가구.

케이크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맛이 좋았다.
커피는 맛을 평가할 만큼 아는게 없어서 입을 다물어야하지만 저런 찻잔 세트에 나오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요…

플레이트랑 찻잔 세트가 작품 같았다.

-하루는 학교 잘 다녀요? 일본 초등학교는 어때요?
-엄청 재밌어하면서 잘 다니는데 일본 학교라 그런가 애들 글씨를 엄청 예쁘게 쓰게 강요하더라고 좀 지나치지 않나 싶을정도로. 내가 너무 옛날에 학교를 다녀서 기억이 안나나? 우리도 그랬나?
-아~ 일본사람들 꼼꼼하고 그 예민한.. 뭔지 알거 같아요.
-근데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이잖아. 예쁘게 예쁘게 무슨 서예하듯 쓸 필요가 있나? 아직 근육이 덜 발달되서 어려운건데. 丁寧に…테이네이니..丁寧に 테이네이니.. (정성들여… 정성들여…) 선생님이 침이 마르도록 잔소리를 하시더라고. 숙제에도 정성스럽지 않은 글씨는 틀린 것처럼 빨갛게 체크하시고.
-아하 ㅋㅋㅋ 테이네이니..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난 좀 불량한 사람인지 지킬 필요가 없는 것 같았어. 그래서 하루한테 그랬지. 하루가 이렇게 지적받는 건 하루가 잘못해서 그런게 아니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엄마는 이 정도면 엄청 잘 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하루야. 세상에 어떤 경우에는 예쁘게 쓰는 것보다 재빨리 쓰는 게 중요할 때도 있거든? 학교 숙제는 선생님이 말 하는 것처럼 예쁘게 쓰는 연습 계속 하고 집에서 쓰는 글씨나 학원에 가져가는 숙제 같은 건 그냥 알아볼 수 있게 써. 그것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리듬있게 스피드 있게 휙휙 쓰는 연습도 엄마랑 하자. 이렇게.
그리고 집에선 크기도 제각각 그냥 알아볼 수 있게 쓰고 있어. 지우개도 그렇게 집착안하고 그냥 찍찍 긋고 다시 쓰라고 했어. 이 문제를 이해하는게 중요한 순간이 있고… 다른게 중요한 순간이 있지 않을까?
-와… 그거 너무 공감해요. 언니 내가 마카오 항공에서 근무할 땐, 음료 서빙을 그냥 한 손에 두세 개씩 요령껏 쥐고 음료 따라주고 효율적으로 촥촥촥 다음 나눠주고 그랬거든요? 근데 일본항공 이직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대요. 딱 멈춰서 한 잔씩 한 잔씩 고급레스토랑처럼 따라주래요. 근데 웃긴게 뭔지 알아요? 꼭두 새벽부터 모여서 우리 회사의 서비스는 왜 느리다고 컴플레인이 끊이지 않는지 개선책을 회의해요. 그걸 왜 모르는지 이해가 안됬다니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앜ㅋㅋㅋ 너무 웃겨ㅋㅋㅋㅋ 시트콤이야?ㅋㅋㅋㅋㅋ 진짜 요즘 들은 얘기 중에 최고 웃기다 ㅋㅋㅋㅋㅋㅋㅋ

정말 오랜만에 빵터졌다. 자기 전에 또 생각나서 한번 더 터졌다. 왝케귀엽냐… (진심으로 귀엽다.. 이런 내 기분 나도 이해불가 ㅋㅋ) 너무 테이네이해서 글로벌 기준이랑 한참 벗어난 너희들.

나는 그렇다. 일본인의 꼼꼼함과 장인 정신 서비스 정신은 확실히 무기다. 세계시장에서 독보적인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일본인을 그렇게 키워내는데에는 당연히 어려움이 있다. 살다 보니 느낀 건데 꼼꼼한 것도 사실은 재능이더라. 꼼꼼하지 못하다고해서 불성실한 것이 아니다. 달리기를 잘하고 계산능력이 빠른 아이처럼 유독 힘들이지 않고 꼼꼼할 수 있고 글씨를 정성스럽고 예쁘게 쓸 수 있는 아이가 있고, 재빠르고 눈치빠르고 대충이지만 행동이 빠른 아이가 있다. 그러니 글씨 잘 쓰는 아이는 그 능력을 키워 서예가라던지 꼼꼼함이 필요한 그런 길을 열어주면 되는 것이다.

학생들 모두 서예가로 만들 것 처럼 일률적으로 예쁘게 쓰라고 하는 건 어딘가 불편했다. 물론 적재적소에 고심해서 글씨를 예쁘게 써 내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서예 시간이 있는 것 아니겠나. (일본학교엔 국어시간과 서예시간이 초1부터 있는데 국어시간 노트까지 서예시간 처럼 쓰라고…. 이게 난… 좀…)

그리고 2015년 1월에 태어난 하루는 2014년 4월에 태어난 아이들이랑 같이 학교에 다닌다. 학교에서 거의 가장 애기일 것이다. 확실히 처음 국어 공책은 장난하는 것 처럼 삐뚤빼뚤 했지만 아이는 하기 싫어서 아니면 마음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게 아니다. 직선,곡선을 그리는 소근육이 조금 덜 발달된 것뿐. 10개월 학교를 다니고 지금 공책을 보면 엄청나게 글씨가 어른스러워졌다. 그 동안 내가 집에서는 예쁘게 쓰라고 닥달하지 않아도 말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도 있으니 혹시 글씨가 예쁘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분들이라면 조급해 하지말길.

하지만 아이 개월 수랑 상관없이 글씨 예쁘라고 집착하진 않을 것 같다. (나도 악필이다) 왜냐면 앞으로 고등 졸업까지 12년간 쓰고 또 쓸 글씨인데 일단 좋아하는게 먼저지. 아이가 글을 읽기도 전에 쓰다 질리겠다. 잘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걸 잘하게 된다는 설도 믿는다. 솔직히 내심, 다 크면 어차피 중요한 것들은 키보드를 통해 작성 될 것인디… 글씨 이쁘게 쓰는게 뭣이가…중허… 이런 생각도 70퍼센트.

아직도 이력서를 자필로 써서 낸다는 일본은 저럴 수 있겠다 싶다가도 (하지만 난 당당히 일본 아르바이트 면접때 이력서를 컴퓨터로 뽑아갔다. 한국에선 컴퓨터로 안 쓰면 너 이 정도 폼에 입력도 못해? 이런 시선으로 보지만 일본은 어? 프린트 해 왔어? 너 우리 회사에 대해 이 정도의 열정이구나? 이런 시선으로 보는 무드)

아무튼, 일단 내가 살아 온 경험치와 느낌대로 글씨 예쁘게 쓸 필요는 없는 쪽에 손을 들고 싶다.
하도 생각이 많이 바뀌고 내가 그리 똑똑한 사람은 아니어서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근거 없이 나 자신 잘 믿는 사람이라. ‘ㅂ’ 최대 수혜자도 최대 피해자도 하루가 되겠군요.

집에 가는 길에 카페 안에 있는 꽃집에서 뭘 사가고 싶었는데 가격 듣고 (한 다발에 5000엔이랬나?워워.. ) 둘이 놀랜 가슴 누르면서 뒷걸음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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