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만 10살 기록

한 2 년간 입었던 유니끌로 잠바를 떠나보내줘야 할 때가 왔다. 흰 양 같던 녀석이 꼬질꼬질 회색 양이 되어가고 있었다. 근데 정 많고 물건에 집착 많은 하루가 도무지 허락을 안 해 준다. 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자기 손 때 탄 물건을 버리거나 처분하는데 엄청 싫어하더라… 이건… 외동이라 그런가?
가끔 뭐든지 외동 탓을 하는 나.. 하나 밖에 낳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습관이다. 엊그제 어떤 일본 방송을 보는데 외동보다 형제자매 있는 집이 훨씬 많다더라. 근데 왜 요즘 저출산, 저출산 하느냐 하니까 안 낳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지 낳는 사람들은 낳을 거면 둘셋을 낳고 살고 있다고.
아… 그 얘길 듣는 순간에도 죄책감이 들었다. 누구한테 드는 죄책감인지는 잘 모르겠다. 케군한테? 조상님? 사회에? 혼자 남을 아이에게..? 모두가 괜찮다는데 왜 나는 미안할까…
가장 맘에 걸릴 하루는 이제 동생이나 형제 필요 없단다. 혼자라 좋다고 말한다. 절친인 유마네 집에 몇 번 가더니 그런 얘길 했다. (내가 유마한테 밥을 두번 해 준 이후로 하루도 그 집에 놀러가서 현관 언저리가 아니라 방에도 들어갈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고 한다. ) 유마네 누나가 중1인데 잘못해서 그 방에 들어갔다가 서슬이 퍼런 눈총을 받았다. 극혐하는 남동생 친구가 들어온 사실이 못마땅해서 넌 뭐야?? 하는데 살기가 가득했다고 ㅋㅋㅋㅋ
죄송하단 말도 못 하고 유마 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야.. 너네 누나 되게 무섭다… 했더니
칼부림 난 적도 있으니까 절대 건드리지 말랬다고.
헉
하루 머릿속엔 누나 = 공포로 자리 잡았다.

아무튼 새 잠바를 사기 위해 온갖 시나리오를 생각하다가 유니끌로 리사이클 박스를 떠올렸다. 잠바는 우리 집에서 꼬질꼬질하다고 구박받는 거보다 다시 뽀송하게 태어나서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거라고 했다. 이 시나리오가 제대로 먹혔다.


아니 근데 보내기 전에 이별 과정이 너무 길었다.
안아주고 속삭이고…
허…
정말 우리 부부에게 없는 F의 피…

기계와 인형이 둘 다 좋은 하루.

우동을 만들다가 자기가 티브이에서 봤다며
간편하고 깔끔하게 김 자르는 법을 가르쳐줬다.

먹을 만큼 지퍼백 입구에 끼워서
지퍼백을 꾹꾹 눌러 닫으면

이렇게 잘 잘린다는 것을 엄청 오랫동안 시연했다.
그냥… 가위를 가져다가 잘랐으면 한참 전에 끝났을 것 같지만… 비밀이다…

새로 수학 개별지도를 다니기 시작한 하루. 카드 스캔하는 곳에 카메라가 있어서 교실에 입실하면 나한테 메일이 온다. 아무도 저렇게 얼굴을 들이밀지 않는데 엄마한테 하루 얼굴 보여주고 싶었댄다. ㅎㅎㅎ
나는 이제 수학 공부로 시작해서 서로 삐져서 말도 안 하는 싸움으로 끝나는 일에 손을 놓기 시작했다.
하루는 공부하고 싶어 하는데 수준을 따라가기 힘들고 나랑 계속 부딪히고 우린 싸우고 하는 문제로 2월부터 두 달을 고통받았다.
그 고민을 홍이가 완전히 청산시켜 줬다.
지가 안 하면 그냥 냅둬버려. 언니는 왜 뭐가 그렇게 힘들어?라는 말에 자기가 보내달라고 하고 싶다고 학원 열심히 등록했는데 계획대로도 못하고 허세만 부리고 가만히 두고 보자니 80만 원이나 하는 학원이 너무 아깝다고 했다. 그러자 홍이가 말했다.
“언니는 결혼 전에 돈을 그렇게 벌어 본 적이 없잖아. 80이 그렇게 큰돈은 아닌 사람도 많아. 솔직히 형부한테 그게 아까울까? 언니, 옛말에 얼굴 이쁜 여자 팔자 좋은 여자 못 이긴단 말이 있어. 언니 팔자에 그걸 뭘 아까워 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정말 맞다. 난 달랑 이백 언저리 벌어 본 게 다였고 80만 원이란 건 너무 큰돈이라 달달달 후달렸던 것이다. 큰 돈 벌어 본 능력도 없도 얼굴도 안 이쁘다고 말을 듣고도 상처감 제로일 수가. 나는 그날 이후부터 대인배가 되었다. 자존감과 함께 통이 뽝 커졌다. 왜냐면 난 돈 못 벌고 이쁘진 않아도 팔자 좋은 년이다. 뭐가 와도 팔자에 대 봐라. 이걸 누가 이기랴. 어떤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데. 이거 정말 고차원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친구가 또 있을까. 친정 엄마 아니고서야. 진짜 사랑이다.
거짓말처럼 그날 이후부터 하루와 갈등이 엄청 줄었고 요즘은 말 이쁘게 하네 마네 이거 말고는 공부에 대한 싸움이 없어졌다. 인생이 급 핑크빛 돌기 시작.
애가 공부 안 하고 있는 게 너무 돈 아까워서 안달이 날 것 같을 때 이 방법 써 보자. 그 돈 매달 어디 기부한다 생각하고 없는 셈 치는 거다. 애가 만약 그 시간에 집에 있는대도 게임하고 티비 보기나 하지 공부를 하지도 않을 거다. 티비 유튭 못 보게 그 시간 학원에 유배 보낸다~ 생각하면 뭐 본전 찾은 거다. 적어도 미디어 중독엔 빠뜨리지 않았으니까. 그런 돈 매달 기부할 정도로 당신은 팔자가 좋다! 당신은 그런 여자다!
(아이가 학원 가기 싫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
그리고 누군가 자신감을 잃어갈 때 팔자를 칭찬해보자. 이건 정말 어디서 배운 스킬이냐 홍아. 지금 어려운 상황이어도 나중에 노년에 팔자가 좋을 거라는 말도 위로가
될 수 있을거다. 팔자라는 말이 생각보다 힘을 가지고 있었네.

공부는 안 해도 집에 오면 나랑 사소한 대화하고 귀여워해주고 꽁냥 거리면 마음이 가득 따듯해진다. 예뻐죽겠다. 그 작은 생각 하나 바꾸니까.

아 맞다. 드림렌즈 시작했다.
나랑 케군 둘 다 시력이 마이너스… 케군은 중학교 때부터 안경을 썼고 난 초4부터였다. 하루도 작년부터 근시가 빠르게 진행됐다. 케군은 사실 드림 렌즈의 부작용은 없는지 너무 걱정이 많아 반대했다. 그래서 내가 내 돈으로 시켜줬다. 내 돈으로 하고 내가 책임지겠다. 본인이 이렇게 원하는데 나는 시켜주고 싶다고 까지 하니 케군은 더 이상 아무 말 안 했다. 자기 마음대로 가족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알바하면서 돈 모은 나.. 잘했다 ㅠㅠ 한국 가서 펑펑 쓰려고 모은 돈인데 코로나때 많이 모아버렸다.
0.6 시력이 낮에는 1.2가 나오는 걸 보고 이제는 케군도 너무 신기해한다. 난 전반적으로 세상이 좋아져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두려워하지 말고 써먹고 봐야 한다는 좀 진취적인 성향인 거 같다.


계란말이를 각 잡고 진지하게 알려줬더니 정말 주부처럼 잘 만들 수 있게 됐다. 나중에 요리라도 할 수 있으면 주방에 취직해서 밥 굶진 않을수도... 어릴 때 엄마가 살다 살다 너무 어려우면 시장 한쪽에 국밥집을 하나 내서 돈을 벌었다. 아빠가 빚지고 어디서 돈을 다 날려먹고 오면 밑천 없이 김밥을 새벽에 잔뜩 말아서 청량리 588 매춘하는 거리에 들어가 그 여자분들한테 김밥을 팔았다. 치킨 집도 두 번을 했고 공장 직원들 점심 밥 해 주는 한바집도 했다. 엄마가 그랬다. 전쟁 통에도 국밥집은 있다고. 사람들은 밥은 먹는다고. 하루가 계란말이를 말고 있을 때 문득 그런 옛날 생각이 났다.



어느 날 이케부쿠로 데이트.
양털 잠바 보내고 새로 산 건 이런 우중충한 곤색 잠바다. 이제 밝은 옷 절대 안 입는 나이…



용돈 모아 오랜만에 프라모델을 샀다.


이번엔 색칠까지 하겠다고 프라모델 전용 물감도 사러 갔다. 이런 코너를 누가 가나 했는데 우리 아들이 가네. 그런데 찾는 물감이 없다고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 달라고 한다. 아마존은 물감은 300엔인데 배송비가 700엔이었다. 그냥 엄마가 어디 가서 구해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혼자 아키하바라에 출동했다.
몇 년 만에 가 봤다. 그것도 갈아타기만 했지 여기서 내려본 건 거의 처음인 거 같기도 하다. 오타쿠 거리답게 역 안에 게임기가 있었다.


추억의 갤러그~
두어 대가 분산되어 있었다. 엄청 추억의 레퍼토리로 여러가지였다. 무료는 아니었다.

아키하바라 거리를 걷는데 하아…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고양이 머리띠를 하고 호객을 하는 메이드 의상의 여자들. 온 거리에 걸려있는 애니매 캐릭터들 끝없이 펼쳐진 전자상가. 참 특이한 복장의 사람들 사이에 외국인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이 사람들이… 일본은 다 이렇다고 생각하면 참 걱정이었다. ㅋㅋㅋㅋ 일본 사람들도 여긴 신기해합니다.


근데 호비 (hobby)라는 오타쿠 건물 현수막이 날 웃참하게 만들었다.
ホビーは心の支え!
知的好奇心をあなたと共に!
취미는 정신적 지주!
지적 호기심을 당신과 함께!!
아니 무슨 북한 당원처럼 거대한 현수막에 붓글씨로 웅변을 해 놨어. 너네… 뭐 찔리는 거 있지!! 저렇게까지 외칠 일이냐고 알았다고 누가 뭐래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족 친구들의 달갑지 않은 눈빛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렇게 두 팔 발려 함께 좋아해주는 그들만의 동네가 있다는 게 다행이다.

프라모델 전문점을 찾았다. 2층에 올라가서 사진을 보여주니 만화에서 오타쿠 캐릭터 같은 남자 직원이 AI 같은 말투로 “이 물감은 저희 매장 3층에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안내해 줬다.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책으로 배운 느낌이었다.

107엔에 사 왔다. 교통비는 따지지 말자.
재밌는 구경도 많이 했으니까.

오… 저기가 그 유명한 AKB48 아이돌 전용 극장이구나.